15대 대한언론인회 회장을 지낸 제재형 회우는 네 아들이 모두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유명인사다. 큰 아들(성호)은 중앙대 법학 교수, 2남(원호)은 서울대 자연과학대 물리학교수, 셋째(강호)는 법무법인 良軒 변호사이며, 넷째(민호)는 이수시스템 대표이사다. 게다가 네 아들이 모두 국군 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며느리들도 모두 쟁쟁한 일꾼들이다. 명문가의 가장인 제 회우는 그것만으로도 주위의 큰 부러움을 사고 있다.
제재형 회우의 실버파이팅은 그래서 ‘대한언론에’ 큰 아들(제성호․중앙대 교수․인권대사)이 쓴 아버지 자랑의 글을 줄여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버지를 말하라”는 대한언론의 원고 청탁에 한 참 망설이다가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몇 자 적기로 했다는 제 교수는 글 제목을 “아버지는 억강부약하는 영원한 기자”라고 달았다.
아들이 본 아버지 像
≪아버지(尺山 諸宰馨)는 일생일업의 영원한 언론인이시다. ‘기자’란 직함을 즐겨 쓰신다. “언제 무슨 소식이 걸려올지 모른다”고 항상 전화기를 열어 놓으신다. “뉴스 소스를 밝히는 기자는 이미 기자가 아니다”란 말씀은 기자는 6하 원칙에 따른 기사로만 말한다는 기자정신의 표현으로 들린다. 기자는 억강부약의 자세로 정론직필을 펴는 문사(文士)라는 지론(持論)이시다.
아버지는 학구열에 불타는 학생이셨다. 대학시절 도시락 2개씩 싸갖고 9시부터 17시까지 강의를 들어 졸업학점(180학점)보다 80학점을 더 땄는가 하면 동기생인 어머니(권영순)와 함께 고등학교 교사 자격증도 받으셨다.
야간 국제웅변대학을 다녀 웅변술을 익혔고 방학 때면 고향에서 서당공부에 힘써 한학 실력을 넓히셨다. 비오고 안개 끼는 날 늑대 우는 공동묘지를 거닐며 간담을 키우셨다. 대학 2학년 때는 할머니(許必亥)와 백부님(諸廷宙)의 명을 좇아 할아버지(諸瑢根)의 문집 ‘우당유고(愚堂遺稿)’를 간행하셨다.
1957년에는 대학졸업, 대학원 진학, 취직 그리고 결혼식까지 네 가지를 실천하셨다. 초등학교에서 대학원까지 18년 걸리는 배움 코스를 16년 만에 끝내신 월반형(越班型) 학구파시다. 신문기자 된지 4년 만에 정치부 차장 대우, 그 2년 후 정치부 차장에 발령될 만큼 기자로서도 열심히 뛰어 다니셨다고 한다. “활자는 총알이다”, “기자에겐 변명이 없다” “특종은 새벽에 난다”, “뛰면서 생각한다”는 명언(銘言)은 장기영(張基榮) 창간 사주에게서 배운 것이고 오늘까지 젊게 사시는 비결은 ‘일이 취미니 늙을 시간이 없다’는 것.
기자시절 태평로(옛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에서 중학동 14번지(한국일보)까지 자주 뛰어다닌 덕분에 다리 힘이 세다고 자랑하신다. 아버지는 충신교회 장로님이시다. 44세 중년에 교회에 나가신지 22년 만에 장로로 장립되셨다. 그동안 장신대 평신도교육대학원,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장신리더십 아카데미, 한국장로교육원을 차례로 수료하셨다. 그리고 장로교육원 총동문회 회장도 지내셨다. 애교심이 강한 아버지는 고려대교우회 상임이사 45년 관록에 지금은 어머니와 나란히 ‘자문역’을 맡고 계신다. 고대교우 라이온스클럽을 다섯 개나 만드셨으며 고대교우회보 편집국장을 거쳐 고대 월례강좌회 회장으로서 ‘건강·장수·행복’을 추구하는 길잡이 역할도 수행하신다. 지칠 줄 모르는 봉사와 섬김의 열정으로 작년엔 ‘사단법인 한국노년소비자보호연합’을 만들어 초대 회장에 취임, 1천만 노년층 소비자의 권익보호·증진운동에 앞장서시는가 하면 ‘사단법인 영통포럼’회장으로서 탈북자 정착지원 사업 및 통일일꾼 교육·양성에도 힘쓰고 계신다. 고성향우회 회장을 거쳐 경남도민회 고문으로서 고향사랑을 실천하며 지역사회를 위한 환경녹색운동과 푸른 강산 가꾸기에도 힘을 보태고 계신다. 라이온스연수원장, 한국JC연수원 교수부장 및 공무원교육원 교수를 역임하면서 후진교육에도 땀을 흘리신 아버지는 지금도 “크고자 하거든 먼저 남을 섬기라. 그리고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자손들을 훈계하신다.≫
제 교수의 글은 더 많은 아버지 자랑과 존경으로 채워져 있지만 줄인 이 글만으로도 제 회우의 인생 파이팅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성공적인가를 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노년에 아들로부터 이 정도의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인사가 얼마나 될 것인가? 성공한 집안은 혼자 이룬 게 아닐 것이기에 사모님을 함께 뵙겠다고 말씀드리고 서울 용산(龍山)에 있는 자택을 찾았다.
이승만관련 저서에 기고
거실 TV에서는 개성 공단 관련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영원한 기자’의 집이란 생각을 했다. 거실 탁자에는 여러 가지 책들이 쌓였고, 놓여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관련 만화책들도 보였다. 두툼한 책의 제목을 보니 ‘내가 만난 이승만 대통령, 남기고 싶은 이야기’였다. (사)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한 이 책에는 “언론자유는 완전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말을 제목으로 한 제재형 회우의 글도 실려 있었다. 또 낯설지 않은 책이 있어 자세히 보니 雩南 李承晩博士 著 <일본, 그 가면의 실체>였다. 제회우가 회장으로 있었던 2007년에 이승만 박사의 영문저서(JAPAN INSIDE OUT)를 대한언론인회가 번역. 출판한 책이었다.
이 책은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의 진주만 기습 5개월 전인 1941년 여름, 일본의 침략근성을 알려 미국 조야(朝野)에 경각심을 높여 주었던 책이다. 이 책의 발간사에서 제재형 회우는 “이승만 박사의 집권말기에 문제가 있었지만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지금으로서는 그 허물을 상쇄하고 이승만 박사의 애국 독립정신과 반공 민주 사상을 재조명함으로써 초대 건국대통령으로서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올바로 세워줘야 할 때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고 썼다.
‘파이팅’의 삶을 살았고 많은 보람을 쌓아온 제 회우는 78살의 나이에도 멈춤이 없다. (사)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이사로 이승만 대통령을 바로 알리고 위상 바로 세우기에 열정을 쏟고 있으며
한국일보사우회 회장, 고려대학교 월례강좌회 고문, 사단법인 과학 선현 장영실 선생 기념사업회 상임고문 겸 심사위원장, 한국장로신문 논설위원, 경남도민회 고문, 서서울JC장학회 이사장 등 10여 가지의 직분을 맡고 있다.
선관위 유권해석 보도로 사표 쓰기도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제재형 회우의 기자시절 모습이 궁금했다.
-기자 생활 이야기부터 해 주실까요?
“나는 정치부 기자로 시작해서 정치부가지로 끝났다고 자부합니다. 국회 출입기자 30년을 늘 자랑거리로 간직하고 있어요. 3대 국회부터 10대 국회까지 출입해서 ‘8선 기자’란 별명을 듣기도 했구요.”
-특종 많이 하셨죠? 그 얘기 좀.
“먼저 내가 사표를 냈던 사건부터 얘기를 해야겠네요. 1967년 이었죠. 그해 6월의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5월에 목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여당 후보를 밀어 달라’는 선거유세를 했어요. 야당인 김대중 후보의 기세를 꺾겠다는 계산이 깔려있었죠. 한국일보 정치부 차장으로 국회와 정당을 출입할 때인데 선관위에 질의서를 보냈어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선거유세에 나서는 것은 불가(不可)하다고 보는 데 ‘귀견(貴見)은 여하(如何)’?라고요. 중앙선관위가 전체회의를 거쳐 보낸 답변의 주문(主文)은 ‘귀견(貴見)과 여(如)함’이었어요. ‘대통령이 여당 지원하는 유세는 선거법위반’이란 기사가 대서특필 됐고 그 일로 회사에 사표를 내게 됐죠. 그 때 장기영 사장은 경제기획원 장관이었고 한국일보 사장은 김모씨 였어요”
-정치 담당기자를 하면서 1962년 말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TV 생중계 기자회견에서 “6․10통화개혁은 실패였다”고 자인하게 만든 이야기도 유명하고 박한상 국회의원과의 친밀했던 이야기 등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만드신 것으로 압니다만 줄이구요. 사모님께 여쭤 볼게요. 제 회장님 처음 만난 게 언제였나요?
대학 2학년때 만나 결혼
“네 고려대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만났어요.”
제 회장과 동갑이며 입학 동기이기도 한 사모님 권영순 여사는 경북예천의 명문가 따님으로 국회의원과 장관 등을 지낸 권영자여사의 친언니이기도 하다. 경남 고성의 명문가 집 아들인 제회장과 권영순 여사의 만남은 또 다른 남남북녀의 인연이란 생각도 들게 한다.
“고려대학교가 대구 피난 시절을 지내고 서울로 돌아 왔을 때 모든 게 낯설고 겁나는 게 많았어요. 입학 이듬해인 1954년 이었어요. 등록금을 내려고 줄을 서는데 잘 생긴 남학생이 친절을 베풀데요. 그리고 수강 신청할 때도 많이 도와주었고… 교직과목을 함께 이수하면서 더 자주 만나게 됐구요. 그 뒤론 계속 만났어요.”
-회장님은 처음 뵌 사모님 어디가 좋으셨나요.
“예쁘장하게 생겼더라구요. 수줍고 착하고. 줄무늬 스커트가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원조(?) 캠퍼스 커플인 두 분은 교직과목 강의실과 캠퍼스에서 파고다 공원으로, 르네상스 음악감상실로 데이트 영역을 넓혔고 졸업하던 해인 1957년 가을에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그 시절에 고대 영문학과를 졸업하셨으면 사회 활동할 기회가 많았을 텐데요.
“미국 대사관에 일하도록 소개하겠다는 말도 있었죠. 그런데 회장님도 저의 사회활동을 꺼리셨고 곧 아이들이 생기면서 육아와 자식 교육에 전념하게 됐어요. 동생 영자가 프랑스 유학할 때 ‘언니가 있을 자리에 내가 있는 것 같아’라고 쓴 편지를 받았을 때 잠깐 부러움이 스치기는 했지만 아이들이 잘 자라줘서 보람이었고 행복했습니다.”
아이들 교육위해 세 번 이사
-네 아들이 모두 서울대학을 나왔고 두 분은 교수 그리고 두 분은 변호사와 이수그룹의 사장이 되셨습니다. 아들 네분이 모두 성공하도록 이끄신 특별한 교육 비법이라도…
“아이들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무척 노력을 했지요. 학원은 보내지 않았구요. 아이들 학습 환경에 맞추려고 진학에 맞춰 집을 세 번 옮겼어요. 나름대로의 맹모삼천지교라고나 할까요.”
-사모님께서 특별히 힘드셨던 일은요?
“네 아이 점심과 저녁 도시락 한꺼번에 8개를 함께 쌀 때가 좀 힘들었구요. 고3 때는 공부하는 아이 옆 의자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으며 수험생의 건강을 보살피기도 했지요.”
-교회에 나가시죠?
“장모님 박정숙 권사님이 기도 많이 하시는 분이세요. 그 분 가르침 따라 믿음을 갖게 됐고 지금은 집 근처에 있는 충신교회를 온 가족이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복음화를 위해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지금 하자는 다짐아래 신앙생활을 계속 합니다.”
-자녀들 자랄 때 모두를 똑 같이, 상도 같이 주고 벌도 같이 내리며 키우셨다면서요?
1주 한번씩 가족모임 가져
“네 아들을 똑 같이 ‘공동 상 공동 벌’로 다스렸고 육사교관이던 큰 아들 성호의 결혼식 때는 육사 교정에서 멋지게 식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다른 동생들 결혼식은 그렇게 할 수 없겠다 싶어 포기하고 섬기는 충신교회에서 네형제 모두 결혼식을 올리도록 했지요.”
네 아들이 결혼하고 손자․손녀가 자라는 지금까지도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 예배가 끝난 뒤에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가 모두 제회우 집으로 모여 식사를 같이하면서 대화와 사귐의 시간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사촌들끼리도 아주 친해졌다는 말씀은 값진 교훈이었다.
제재형 회장은 세상에서 개인의 삶도 성공했고 자녀 교육도 성공했다. 깊은 신앙생활을 통한 내세에 대한 축복도 받았다.
고려대학교 여자교우회 회장과 석란장학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낸 수필가 권영순 여사와의 금슬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며느리들도 쟁쟁한 박사요 교수요 아나운서이며 7명의 손자․손녀도 모두 자랑스럽게 자라고 있다. 오는 7월27일엔 손서(孫壻)를 본다고도했다. 그 집안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인물들이 계속 나올 것이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