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쾌적한 환경에서 맘껏 뛰놀아야 발달하는데, 공부만하라고 다그치는 것도 아동학대입니다. 아이들의 놀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죠”
朴東銀 유니세프(UNICEF·유엔아동기금) 한국위원회 부회장은 “세상이 변한 만큼 이제는 어린이들의 삶의 질을 높여 주는데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문을 연다. “이제는 빈곤층 어린이를 돕는 차원에서 어린이들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이 부모와 기성세대들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본회 박동은 회우(77)를 지난달 15일 오후 서울 청운동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세계 가정의 날이자 스승의 날이다. 6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청운초등학교는 박 회우의 모교. 운동장에 뛰어노는 아이들의 발랄함에 초록빛 싱그러움이 묻어난다.
실버파이팅 연재 4년 11개월 만에 첫 여성 회우와의 인터뷰도 신록처럼 새롭다. 방문한 시간 비서실 여직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터라 커피를 직접 타 내온다. 희수(喜壽)를 넘겼어도 건강미가 넘친다. 이웃집 아줌마처럼 소탈하다. 국제적인 아동 구호 전문가답게 달변에 영어가 자연스럽게 뒤섞여 나온다. 사업 설명에 오류는 없는지 연신 인터뷰어의 메모지를 확인하며 첫 째, 둘째, 확인하며 말을 잇는 여성 특유의 꼼꼼함도 엿보인다.
-아이들이 누려야 할 권리는?
“1989년 11월 20일 유엔총회는 어린이의 생존, 보호, 발달, 참여 등 네 가지 기본 권리를 명시한 유엔아동권리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Children)을 채택했습니다. 어린이를 보호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명시한 획기적인 협약이죠. 우리나라를 비롯한 193개국의 비준을 받은 어린이 인권조약입니다.” 1990년 9월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어린이를 주제로 한 ‘세계 아동 정상회담’이 뉴욕에서 열려 열악한 세계 아동의 삶을 개선키 위한 7개 목표가 세워지고, 유엔총회는 각국에 이를 추진키 위한 NPA(국가행동계획서)를 제출토록 결의한 바 있다. 세계아동정상회담은 2000년 9월 UN총회에서 채택한 8개항의 새천년 개발목표(MDG)의 디딤돌이 됐다.
-아동학대, 성폭행 등 아동권리협약의 정신을 무색하게 하는 사건들이 터지고 있다
“최빈국은 아동의 생존권이 풀어야 할 과제이고, 선진국은 아이들을 안심하고 밖에 내놓을 수 없는 환경이 문제지요. 한국의 경우 학교폭력과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소외감도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입니다.”
‘차별 없는 구호의 정신’으로 전 세계 어린이, 특히 개발도상국 빈곤층 어린이를 지원하는 유엔기구 유니세프는 1946년 12월 11일 창립됐다. 한국과는 1948년부터 관계를 맺기 시작, 1950년 3월 정부와 기본 협정을 체결하고 공식적인 활동을 전개해왔다. 박 회우는 1988년 주한 유니세프 대표부 대외담당관으로 유니세프와 인연을 맺고,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창립의 실무를 총괄했다.
유니세프 한국위 창립 산파역
-빈부격차가 심한 우리나라에서 조직 구성과 모금활동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당시 우리사회의 모금에 대한 인식은 연례적인 불우이웃돕기 성금이나, 군사정부가 기업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준조세격인 모금이 고작이었죠. 주변에서는 재벌총수나 군부의 실세를 대표로 영입하거나, 정부출연기관으로 출발해야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어요. 하지만, 유니세프는 자원봉사를 기본으로 시민사회에 호소하는 순수 민간기구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추진했습니다.”
그는 대중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회지도자와 전문지식인 가운데서 유니세프를 위해 봉사해줄 인사를 찾아 나섰다. VTR를 승용차에 싣고 다니며 유니세프 사업을 설명했고, 인맥을 총 동원하여 사람들을 만났다. 2, 3년의 노력 끝에 유니세프를 후원하는 문화예술인클럽, 언론인클럽(김진현 회장), 사립초등학교장클럽, 어머니클럽, 변호사클럽 등 5개의 후원 클럽을 결성했다. “그 과정에서 영화배우 안성기 씨, 소설가 박완서 씨, 디자이너 앙드레 김을 친선대사로 모시게 됐다”고 한다. 두 분은 고인이 됐고, 안성기 씨는 지금도 아프리카 등을 누비며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최근엔 탤런트 김혜수씨와 원빈씨가 특별대표로 합류했다
1993년 유니세프 본부와 한국 정부 간의 승인합의서를 마련하고 이듬해 1월 1일 유니세프한국위원회를 발족시켰다. 玄勝鍾 전 국무총리(전 성균관대 총장)가 초대 회장에 선임 되고, 박동은 대외담당관은 사무총장에 임명됐다.
-발족 후 최빈국서 기부 선진국이 된 비결은?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DM캠페인(호소 편지를 통한 후원자 모집)을 펼쳤어요. 우리나라도 못 사는 데 왜 남의 나라 아이들을 돕느냐는 저항도 있었지만, 편지를 받은 시민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이 나와 힘을 얻었죠”
그 뒤 유니세프카드와 선물용품 판매, 아시아나항공의 기내모금, 걷기대회, 연말 디너쇼 등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대중 모금을 통해 모금액을 늘려나갔다. 그는 “더 큰 모금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며 공격적인 전략을 폈다. TV광고, 신용카드사와 공동 캠페인 등을 전개한 결과 투자 효과를 톡톡히 봤고 모금액은 늘었다.
지원받던 나라서 지원 선진국으로
“한국위원회 출범 첫 해에 350만 달러(약 32억원)를 모금하여 지원했어요. 지난해 총 지원금은 7천543만 달러(약 816억원)로 개발도상국 지원금 세계 4위나라가 됐습니다.” 1위는 일본, 2위는 미국, 3위가 독일이다. 19년 만에 모금액이 21배 늘었다. 유니세프의 지원을 받던 나라에서 기부선진국 대열에 우뚝 섰다.
“당연히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의 위상도 높아졌어요. 본부 지원금 가운데 20%는 우리가 지정하는 나라에 지원합니다. 지정기탁국가는 북한(연간 200만 달러 지원)을 비롯하여 캄보디아, 미얀마, 베트남, 몽골, 수단, 예멘, 등 18개 국이죠” 박 사무총장은 최빈국서 기부선진국으로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한국위원회 운영은?
“유니세프 본부는 모금액의 75%를 보내라고 하지만, 우리는 86%를 보내고 있어요. 나머지 14%를 운영비와 인건비 등으로 사용합니다.” 그동안 후원회원도 35만 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그는 2005년 11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를 비롯해 굿네이버스, 월드비전,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 등 총 14개 단체와 아동전문가들이 참여해 발족시킨 유엔아동권리협약 한국비영리기구(NPO) 연대 창립총회에서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지금까지 맡고 있다.
이밖에도 연간 모금액 5억원 이상 단체의 연합인 한국NPO 공동회의(32개 단체)의 공동대표로 선임됐다. 또한 한국해외원조단체협의회의 이사로서 정부와의 소통 및 동반 관계 구축, 한국정부의 ODA(공적개발원조기금)를 늘리기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 하고 있다. 요즘은 정부가 먼저 NPO를 찾아와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는 등 NPO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음을 실감한다는것.
-직함이 부회장이신데?
“지난해 4월 기구개편과 함께 송상현 ICC(국제형사재판소)소장이 회장으로 선임되고, 부회장으로 선임됐어요.” 그는 “NGO활동은 권위의식을 없애고 창의력을 발휘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능력을 키워갈 수 있어서 적성에 맞았다.”고 회고한다. 그동안 펼친 아동구호사업의 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1982년), 제1회 YWCA 한국여성지도자상(2003년), 비추미여성대상 해리상(2008년) 등을 수상했다.
동아일보 공채 1기 사회 첫발
경기여고와 숙명여대 영어영문과를 졸업한 박동은 회우는 동아일보 공채 1기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신문기자가 적성은 맞았으나 남성들 틈새서 적응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고 한다.
“영어를 활용할 기회가 많은 외신부에 가고 싶었으나 밤샘 근무에 여기자는 제외 되어 꺼리더군요. 문화부와 사회부 기자로 열심히 뛰었고, 김포공항 출입 때 ‘나그네의 눈’이란 칼럼을 연재한 게 기억에 남습니다.” 쪽 찐 외국 여자, 바늘 없는 주사기, 동두천 위안부 등 공항을 오가는 특이한 이들을 관찰해 쓴 ‘기자 수첩’으로 인기를 끌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 때 마다 그는 순탄하고 평범한 길 보다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9년 6개월 만에 신문사를 나와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오리건대학에서 신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하여 1972년부터 3년간 성균관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과 시사영어 강의를 했다. 유신헌법의 소용돌이 속에 시위와 휴강으로 캠퍼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대학 강단을 떠나 1976년 대한가족계획협회 홍보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가족계획협회 업무 대부분은 아이 덜 낳게 하자는 것과 남아선호관을 없애자는 대국민 홍보였어요. 개인적으론 개발도상국일수록 여성들이 아이 낳는 데 일생을 보내다가 자기 계발과 노후 준비를 못 하고 있는 데 대한 문제의식이 강했어요. 가족계획을 잘 세워 각 가정 형편에 맞게 낳아 훌륭하게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쉼 없이 달려 온 삶, 여백 갖고 싶어”
시대별 인구정책 표어와 출산율을 대비해보면 가족계획은 가장 성공한 정책 사례다. 정부는 60년대 들어 인구 억제 정책을 대대적으로 폈다. 가족계획협회가 발족되고 피임법이 보급됐으며 콘돔이라는 생경한 피임 도구가 등장해 감췄던 성(性)이 드러나는 등 사회적 파장도 컸다. 60년대 초에는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표어와 더불어 ‘3-3-35 운동(세 자녀를 3년 터울로 낳아 35세에 단산)’을 펼쳐 10년 뒤 가임(可妊)여성의 평균 출산율은 4.5명으로 떨어졌다.
70년대 들어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를 채택, 두 자녀 캠페인을 실시하면서 남성들의 정관(精管)을 막는 수술을 권장하기 위해 예비군 훈련장에서 시술 희망자에게 훈련을 면제해주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박 회우가 1976년 홍보부장으로입사 했을 때 한 가정의 자녀수는 평균 2.8명으로 줄어드는 성과를 나타냈다.
“당시 현장조사 결과 아이 둘 정도를 낳는 것은 국민 정서상 상당히 허용되는 부분이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남아선호사상을 없애는 것이 일차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80년대 초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표어를 채택했지요.” 그 뒤 80년대에서 90년대 중반까지는 ‘사랑 모아 하나 낳고 정성 모아 잘 키우자’는 ‘한 자녀 갖기 운동’으로 1986년에 이미 합계출산율이 1.5명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지금은 저출산을 걱정하는 시대가 됐다.
“저출산은 이미 70년대 말부터 국제적 트렌드였다”면서 “인구정책은 유연성을 가지고 인구가 늘어나면 줄어들 수 있도록, 줄어들면 늘어날 수 있도록 매력적인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요즘은 독신이 자연스럽지만 예전에는 여자 혼자 산다는 게 어려웠을 텐데요?
“젊어서부터 결혼을 먼 훗날 남의 일처럼 생각했어요. 무조건 결혼이 아니라 가정을 가질 준비가 된 사람들만이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기자, 홍보맨, NGO
의 공통점은 사람만나는 일입니다. ‘인간의 숲’에서 희망을 보았지만, 인연이 없는지 짝은 못 만났죠(웃음). 부모님도 독신에 관대하셨어요.”
경기여고 영어 선생님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영어를 자연스럽게 접했고, 동아일보 공채시험도 영어 성적이 좋아서 합격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어머니는 평양 숭의여고를 졸업한 엘리트. 박 회우는 4남매 중 고명딸.
-건강은?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지는 않았어도 이상은 없어요. 열심히 뛰어다닌 것이 운동이 되었나봅니다.(웃음). 2년마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실시하는 건강검진 결과 아무 이상 없습니다.”
-계획은?
“그동안 개인 생활은 없다시피 바쁘게 살아왔어요. 부회장이 되면서 결재라인에서는 손을 떼었지만 NPO 활동에 깊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국위원회의 위상을 높이는 NPO 활동을 많이 맡고 있어요.” 이제는 일주일에 서너 번 사무실에 나오고, 양평에 있는 조그마한 농장을 오가며 채소나 가꾸며 삶의 여백을 갖고 싶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