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서울대병원 1층 외래 장애인 창구에 가면 밝은 미소의 멋지고 친절한 노신사를 만날 수 있다. 노인 환자들을 돕는 자원 봉사자 이종전 회우다.
34년째 대학병원서 봉사활동
올해 78세인 이 회우는 매주 월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씩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외래 환자들을 위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시설과 의료진을 안내하고 진료의뢰서를 써주는 등 맞춤 서비스를 한다.
2달에 한 번 정도는 병원 당국자들과 함께하는 회의에도 참석하는 데 환자들을 만난 경험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병원 행정에 반영될 때는 정말 기쁘다고 한다.
나이 들어 하는 이 일이 정말 자랑스럽고 불편이나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때는 가슴 뿌듯하고 최고의 보람이라는 이 회우에게 물었다.
- 어떤 인연으로 언제부터 봉사활동을 하시게 됐나요?
“1978년 아내가 원남동 서울대학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고 6개월 동안 항암치료를 받았어요. 끔찍했지요. 어느 날, 뼈와 가죽만 남은 아내가 하도 고통스러워해서 무조건 응급실로 달려갔어요. 그런데 곧 죽을 것만 같은 환자를 의사들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응급실 바닥에 놔두는 것이 아니겠어요.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거칠게 항의 했어요. 그런 연유로 병원장을 만나게 됐는데 병원의 사정과 의사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도 있을 테니 직접 응급실 체험을 해보라고 권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79년부터 원남동 서울대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시작 했어요. 아내의 건강을 위해 서울을 벗어나 공기 좋은 경기도 광주의 산속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2003년 6월 개원한 분당서울대 병원으로 옮겨 자원봉사를 계속하고 있지요.
그리고 지금은 환자편의향상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벌써 34년이나 됐네요. 아내의 병수발을 하면서 생각도 많이 바뀌었어요.
그 동안은 나만 생각하면서 살았거든요. 아내의 병세도 많이 호전돼서 지금은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많은 이야기들에 현혹되지 않고 의사가 하라는 대로 따랐어요. 다만 홍삼은 많이 복용 했지요”
병원봉사 통해 인생 공부
- 지켜보신 일 들 가운데잊혀 지지 않는 사연은요.
“귀한 인상의 한 할머니가 생각나네요. 그 할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다녔어요.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면 꼭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곤 했어요.
1년이 지난 뒤에는 침대에 누운 채 이동하면서도 시선이 마주치면 작은 미소를 지으려고 애쓰곤 했지요. 그리고 1년 뒤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제가 법조기자를 13년 해서 아는 법조인이 많아요. 어느 날은 파킨슨병으로 입원했다는 전 서울지검장을 만났어요. 그 분 말씀이 참 귀한 일 한다고 격려하면서 ‘나도 기운이 있으면 그런 일 하고 싶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분은 지금 의식불명인 채로 노인 병원에 계십니다.
병원 봉사활동은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고 싶은 일입니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병으로 고생하는 언론계와 법조계 등의 선배와 동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인생 그리고 건강과 병,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하곤 합니다.”
서울 출생인 이 회우는 성남중학교 4학년 때 맞았던 6·25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용산전화국장이던 선친께서 6·25 이틀 전에 광주(光州)전신전화건설국장으로 전근되시는 바람에 중학교 6학년이던 형과 서울에 머물다가 형제가 북한군에게 잡혀 부평형무소에 갇힌다. 두려움의 1개월 여 뒤에 풀려나 서대문 삼촌댁에서 기숙했던 일, 서울 수복과 함께 선친께서 몰고 오신 스리쿼터를 타고 광주로 가던 일, 특히 순창지역을 지나던 중 공비의 습격을 받고 논두렁에 숨었던 일 등이 어제 일 같다.
1954년 성균관대 국문과에 입학했는데 박종화, 조윤제, 손우성, 오화섭 교수 등의 가르침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학 4년 동안 줄곧 학회장을 지냈다.
기자생활은 행복했고 취재는 즐거웠다
-어떻게 해서 기자가 되셨어요?
“ 대학 다닐 때도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에 취미가 남달랐지요. 졸업하던 해인 1958년에 대학생 신분으로 세계통신기자 시험에 합격해서 사건기자로 사회부 기자로 언론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언론계 생활 40여년은 그냥 신나고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취재하는 게 마냥 좋았고 기사 쓰기는 재미있었고 신문에 인쇄된 내 기사를 보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 지금도 생각나는 선배나 동료기자들이 있지요.
“물론입니다. 세계통신에 입사할 때 편집국장이 김현재 선배였는데 사건기자의 대부라고 불리었지요. 김현재 국장은 여수·순천 사건 때 반란군의 진중으로 들어가 대장과 인터뷰한 기개가 대단한 기자였고 부장과 국장이 된 뒤에도 특히 후배들을 잘 챙겨서 야간 취재를 하던 기자들이 수시로 김 국장 집으로 쳐들어가 야식을 먹고 술을 마셔 고주망태가 됐던 일이 전설처럼 전해지기도 하지요.”
이런 사연과 분위기는 이 회우의 유전인자를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자인하는 이회우의 1남2녀 중 막내딸인 이윤우 경민대학 디지털영상과 초빙교수가 전해온 아버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서도 잘 나타난다.
≪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적 저희 집은 늘 북적거렸습니다. 특히 밤에…….
술이 거나하게 취하시면 늘 사람들을 저희 집으로 데리고 오셔서 술 한 잔을 더하셨는데 어린 저의 눈에는 조금 무서웠습니다. 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 보면 술에 취해 너부러져 있는 아저씨들이 있어 늘 저를 놀라게 했기 때문입니다.
밤중에 시끄럽게 떠드는 아저씨들 때문에 잠을 설쳐 짜증도 났지만 지나고 보니 사람 좋아하고 같은 기자식구들을 챙기고 싶어 했던 아버지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 회우는 세계통신을 시작으로 자유신문을 거쳐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에서 민완 사회부기자로 이름을 떨친다. 특히 법조출입 13년이란 대단한 경력을 쌓았다.
간첩관련 오보·특종이 기억에 남아
-특종도 많이 하셨을 텐데 기억에 남는 기사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오보·특종이죠. 법조 출입 기자였을 때 이야깁니다. 법원 영장계에 숨어들어가 캐비넷을 열고 급히 기록을 훔쳐봤어요. 내무장관 의 동생이 북한 간첩으로 내려와 형을 접선했다는 내용이었어요. 급히 메모한 내용을 기사화 했지요. 이혜복 사회부차장이 송고를 받아 처리했구요.
북한 간첩이 남파돼 고위직 인사를 접선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무장관의 동생이 아니라 법무차관 김영천의 동생이었으며 김 차관은 자수를 권했으나 불응하자 당국에 고발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보· 특종이었지요. 난리가 났고 치안국 분실로 연행돼 이틀 동안 조사를 받았습니다. 침침하고 길었던 복도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무거워진답니다. 간첩으로 넘어온 처남을 만나고 신고하지 않아 구속되고 재판을 받은 오화섭 교수사건도 기억에 남습니다. 오 교수는 저의 성균관대학시절 은사였으니까요. 다음은 조동오 선배이야기인데 경찰국장인 매부가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한다는 기사를 제가 특종하고 송고했어요. 조 선배한테 말했더니 얼굴이 하얘지는가 싶더니 바로 전화기를 집어 들고 그 기사를 송고하는 것이었어요. 기자정신의 산 표본을 보았고 코가 시큰했어요.”
-1980년에 해직되셨지요.?
“네 경향신문 수석 논설위원이었을 때입니다. 같이 일하던 서동구 편집국장이 구속됐는데 주변의 만류를 무시하고 특별면회를 했어요.
법조통이었으니까요. 그 일로 요주의 인물로 지목 되었고 ‘군부는 경제문제에는 간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사설을 써달라는 종용을 받았는데 거부 했고 결국 해직통보를 받았지요.
그 요구를 받아들인 다른 신문사 논설위원은 나중에 장관으로 발탁되었지요.”
그 후 이 회우는 1982년에 언론연구원 이사, 방송위원회 심의위원장, 동명정보대 객원 교수 등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아내위한 삶, 이웃 위한 봉사 다짐
-부인 이혜옥 여사와는 연애 결혼하셨나요?
“ 경향신문 어임영 선배의 소개로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박혜옥씨를 만났지요. 처음 데이트를 약속했는데 데스크가 송요찬 계엄사령관 집을 스케치 하라는 거예요. 사정을 말하고 2~3시간 뒤에 달려갔는데 박양이 다방에서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더라구요. 많이 고마웠어요.
미인이었어요. 특히 종아리가 예쁘더라구요. 얼마 뒤에 생존하셨던 할머니께서 손자며느리 감을 꼭 보셔야 된다고 고집하셔서 몰래 보여드렸어요.
그런데 할머니께서 극구 반대하셨어요. 가냘픈 외모를 가리켜서 저 몸 가지고 어디 애를 낳겠느냐구요. 그 때는 이미 가냘픈 외모와 예쁜 종아리에 마음이 굳어져 있었는 걸요. 암으로 고생을 했지만 애들을 3명이나 낳았고 모두 잘 키웠지요. 아들과 사위 둘, 그리고 막내딸까지 대학 교수이고 이제 손녀·손자들이 모두 6명이랍니다. 아이들이 성공한 것은 모두 아내의 공이죠.
우리시대 기자들이 대개 그랬지만 자녀 교육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집에 일찍 올 때면 친구나 후배들을 달고 와서 술상 보라고 하기 일쑤였거든요.
아내가 암 투병을 하는 동안 처절하게 자신을 되돌아 봤어요. 나 자신 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것을 많이 반성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내를 위해 살겠다. 그리고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지요“
- 멘토라고 꼽을 만한 분이 계신가요?
“제 인생의 멘토는 이용훈 변호사입니다. 이변호사는 인혁당 사건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검사였는데 법률가로서의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사표를 낸 소신 있는 검사였죠. 기자와 검사로 만났지만 통했고, 후견인으로 많은 조언과 후원을 아끼지 않으신 고마운 분이십니다.
제가 지은 <법이 바로서야 세상이 바로 선다>는 책의 추천의 글도 써 주셨고…”
- 고령화 시대라고 하는 데 병원에서 봉사하시면서 노인 환자들을 많이 보셨잖습니까? 노인 질환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 주시지요.
“노인 요양문제에 대해서 아직도 가족 전통적인 의식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고는 합니다만 사회 안정성을 위해서도 그렇고 노인 환자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전문시설에서 전문적인 관리를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장모님 상을 당했어요.
두 달만 더 사셨으면 만 100세가 되시는데 혼자 아파트에서 간병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생활하시다 돌아가셨어요. 아직도 요양시설은 좋지 않다는 인식이, 가족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이 세태지요.
저 자신은 1994년에 이미 장기기증 등록을 했구요. 요양시설의 기능적인 장점을 높이 보고 있어요.”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고 계세요?
“췌장염 선고를 받은 일이 있어요. 그 후로 식이요법과 운동을 철저히 해서 일상생활과 봉사활동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술, 담배는 물론이고 고기도 먹지 않구요. 저녁에 탄천 수영장에서 아쿠아 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녁 11시 30분쯤 잠자리에 들고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납니다.”
<법이 바로서야 세상이 바로 선다>
막내 따님인 이윤우 교수는 아버지를 ‘사색을 즐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늘 책을 가까이 하십니다.’ 라고 소개했다.
사실 인터뷰 약속을 잡으려고 첫 전화를 드렸을 때 무엇하고 계시냐고 물었더니 “송호근 교수의 <그들은 소리내 울지않는다>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읽을 만하네요.”라고 했고 인터뷰를 위해 광주 신현리 자택을 찾았을 때는 김영란·김두식 공저의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란 책이 탁자위에 놓여있었다.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이었다.
손녀·손자들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내 보물들이지요.” 라는 이 회우에게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고 계시냐고 물었다.
“손녀·손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책을 사주는 것이 가장 큰 일이고 보람입니다. 보고 싶은 책을 말하면 그건 꼭 사줍니다. 그런데 큰 손녀가 대학가면서는 부탁하는 외국 원서가 꽤 비쌀 때가 있어요. 그래도 그 약속은 꼭 지킵니다.”
기자생활이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웠으며 34년째 병원 자원봉사가 기쁘다는 이 회우는 <법이 바로서야 세상이 바로 선다>는 저서의 제목처럼, 바른 나라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책 선물로 후손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무엇보다 ‘귀함’ 을 실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