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장맛비가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지겹게 내리던 지난달 11일 오후 3시. 당산역 9번 출구 앞에서 본회 金珍培 회우를 만났다. 해바라기 꽃무늬가 해맑게 웃는 남방 차림이다. 아파트는 지하철역과 지척의 거리다. 반갑게 맞이하는 안주인은 단아하고 젊어 보인다. 거실은 기역자 벽면을 가득채운 서가, 컴퓨터와 프린터기가 놓인 책상, 일자형 소파가 놓여 비좁다.
한 쪽 벽 작은 액자에 미소를 머금은 스님의 캐리커처 아래 주민등록 번호와 비슷한 숫자가 새겨져있다. 340409-150801. 주민등록 앞자리 숫자와 죽음을 예상한 날짜를 조합한 명패다. ‘인사 차리다 언제공부하나. 하루 8시간 이상! 8당 6락이다. 헌법 이야기를 즐겨라. 책과 인터뷰, PC앞에 기쁘게 몸을 던져라. 팔순을 맞는 네가 다짐한 성스러운 의무다. 1912. 9. 4 중암(호)’이라 쓴 쪽지를 붙여놓았다.
1934년에 태어났으니 우리나이로 여든. 예상대로라면 2년 뒤엔 이승을 하직한다. 명패 아래에는 선덕여왕신종을 본뜬 작은 종과 나무망치가 놓였다. 탁상용 캘린더에는 사인펜으로 날짜마다 동그라미(O)와 가위표(X) 표시를 해 놓았다. 7월 첫날만 가위표고 전부 동그라미다. 하루 8시간 공부하면 성공한 날, 6시간이면 실패로 판단한 일일평가다.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도 무사히 지냈다”며 종을 땡땡땡 세 번 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다시 환생 했다”는 의미로 땡땡땡 종을 세 번 치며 하루를 연다.
-명패를 만든 동기는?
“3년 전 폐암 수술을 했어요. 왼쪽 폐를 4㎝ 잘라냈죠. 그 뒤 명패를 만들었어요. 과거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이고 지금입니다. 과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부끄럽게도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자문하며 건강하게 하루를 시작 할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하며 삽니다.” 수술 후 삶의 애착 보다 삶을 관조하게 된 철학적 사유를 차분하게 설파한다. 초탈의 경지다. 부처와 예수는 동경의 대상일 뿐 종교는 없다고 한다.
‘그 놈의 헌법’ 이달 초 출간
-근황은?
“2년 전 관훈클럽의 저술지원을 받아 집필한 원고를 최근에 탈고하여 출판사에 넘겼어요. 8월 5일 출간 예정입니다.
-제목은?
“‘김진배의 헌법이야기’라고 부제를 붙인 ‘그놈의 헌법’입니다.”
-제목이 시니컬합니다.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다뤘습니다. 헌법을 지키겠다고 국민 앞에 선서하는 사람은 대통령뿐입니다. 그들이 앞장서 헌법을 파괴한 것이 아이러니컬하죠. 역대 대통령의 공과와는 별도로 권력자들이 집권 연장을 위해 궤도를 이탈한 헌법의 수난사이자 얼룩진 이면사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법의 어머니가 헌법인데, 국민들은 헌법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거나 행복추구권과 기본권이 거저 보장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산다는 것이지요. 즉 국가권력은 강제력이 있지만 권리보장은 사후적이어서 강제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금을 안내면 압류를 하지만 국민들의 권리나 피해보상은 요구를 해야 반영됩니다.” 차분하고 조리 있게 말을 잇는다. “헌법이 권력자나 특권층의 도구가 아니라 약자의 보호자가 될 때 헌법은 제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1948년 헌법 제정이후 9번에 걸친 개헌 가운데 7번이 집권연장을 위한 개헌이다. 이승만 정권의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은’ 불행의 씨앗이 되어 하야 후 망명길에 오른다. 군사정부도 집권연장을 위해 헌법을 고쳤다. ‘유신헌법’과 ’간선제 대통령 7년 단임‘은 헌법이 국민의 편이 아닌 권력자의 편이라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민주적 개헌은 4·19혁명 후 과도정부를 거쳐 1960년 제2공화국의 토대가 된 제3차 개헌과 1987년 6월 항쟁이 일구어 낸 현행헌법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 개헌이다.
-여든 살인 올해 8월, 저서가 출간 된 것은 노 기자의 펜은 아직도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 줘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철저한 고증과 취재를 바탕으로 이전에 밝혀지지 않았던 생생한 증언을 통해 현장감을 살리려고 힘썼습니다.” 단순한 헌법의 통사가 아니라 누구나 실증적으로 알 수 있게 기술하여 현대사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게 출판사 측의 설명이다.
‘외톨박이 언론인’으로 기고
-언론계 22년, 국회의원 2선 8년, 바쁘게 산 기간에도 꾸준히 저술활동을 하셨군요.
“지금도 취재를 위해 카메라와 녹음기를 챙겨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고 있어요. 건강이 허락하면 헌법이야기를 시리즈로 출간할 계획입니다” 그는 역저 ‘백성의 권리’(1960년), ‘비화 제1공화국’(1975년), 칼럼과 취재기를 담은 ‘당신들의 아픔을’(1978년),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전기(1984년), 김대중 자서전 ‘인동초의 새벽’(1987년)을 비롯하여 ‘권력의 암부’, ‘선거로 본 해방 40년’ , ‘개헌의 역학’ , 수십 편의 정치관계 논문과 인물평, 논픽션 등을 펴내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어디에선가 스스로를 ‘외톨박이 언론인’이라고 했던데요?
“11대 국회의원(부안․김제) 임기를 끝내고 12대 총선에서 떨어진 뒤 살길이 막막했어요.
1987년 말 20여 년 살던 국민주택 융자 은행보증을 잘못서 송두리째 날아가 집도 절도 없고 생활비도 없었죠. 언론계를 찾아다니며 기고를 제안해도 ‘DJ 맨’이라고 기피했어요. 연고도 인연도 없는 ‘월간 조선’ 차장이 만나자고 하더니 ‘장면 민주당 정권 8개월’을 100장 쓰라고 하더군요.”
그는 반갑지만 발행인이나 편집인 확답 없이 써도 되겠느냐고 확인했다. 게재되지 못하더라도 원고료는 1장에 5000원씩 주겠다고 해 써 넘겼다. 방우영 사장도 “내용과 글이 좋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우편환으로 부쳐온 원고료는 세금 떼고 102만원. 그 뒤 매달 120장씩 1년간 기고했다. 5개월 쓰고 나니 다른 시사 월간지에서 원고청탁이 들어 왔으나 쓸 여력이 없었다. 새로 창간되는 신문사에서 사장 주필 제의도 있었으나 사양했다. 조직에 얽매이면 펜은 제약당하기 때문이다. 1992년까지 3∼4년간 자유기고가로 자유롭게 활동하던 시절을 ‘외톨박이 언론인’이라 자칭했다.
-경향신문 수습 2기시죠?
“대학(고려대학교 법과) 3학년 때 고등고시 사법과(8회)를 봤어요. 두 번은 안보겠다고 다짐하며 꼭 붙을 것이라 확신했는데 낙방했어요. 겨우 5명인가 6명인가 합격해 정나미가 떨어졌죠. 졸업하던 1958년 경향신문기자 시험을 쳤어요. 대학을 졸업해도 막상 갈 곳이 별로 없던 시절 운 좋게 붙어 이듬해 1월 2일 첫 출근 했습니다.”
응모자 367명 가운데 최종합격자는 6명, 60대 1이다. 고대 법과 동기인 여영무를 비롯하여, 신광일, 정태경, 임판호, 조규진 등이다. 수습기자 때 교정부 말석에서 원고를 보던 중 한창우 사장이 편집국에 들러 “견습기자 김진배 어디있나?” 우렁찬 목소리로 그를 찾았다. “이 놈이 논문 1등이라고? 정치부장(송원영) 소원대로 정치부에서 견습을 시키시오”한다. 출발은 좋았다. 입사 4개월 만인 1959년 4월 30일 자유당 정권에 의해 폐간되는 불운을 맞았다. 전북일보와 세계통신에서 답답한 세월을 잠시 보냈다. 정간된 지 361일 만인 1960년 4월 27일 복간됐다. 인찰지에 묵지를 대고 골피로 쓴 대법원 복간 판결문을 정리해 넘기며 활자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JP 정계은퇴 특종, ‘借款필화’ 곤욕
-1963년 동아일보로 옮긴 계기는?
“제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동아일보 김성열 정경부장이 소공동 경향신문 앞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해 나갔더니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어요. 내 기사 잘 보고 있으며 보너스가 더 많다는 조건에 솔깃했죠. 선거 끝난 뒤 가겠다고 했으나 당장 오라고 해 대통령선거를 며칠 앞두고 동아일보 정치부로 옮겼지요”
동아일보도 영욕의 세월이었다. 1968년 5월 30일 ‘JP 정계은퇴’ 특종을 했다. ‘김종필씨 공화당 탈당’ 특호 활자에 ‘의원직 등 모든 공직 사퇴, 국민복지회사건과 관련 있는 듯, 본사 기자 단독 회견’이 부제로 나갔다. 신문사에서 특종상을 받았고, 기자협회 기자상(제2회)을 수상했다. 국회팀장인 그가 여행경비를 지원받아 3주일 동안 동남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던 그해 11월 25일 김포공항 비행장 트랩 밑에 ‘저승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산’으로 호송됐다. 1968년 ‘신동아’ 12월호에 특집으로 실린 차관(借款)기사(김진배․박창래 공동집필)가 문제가 된 것을 안 것은 다음날 새벽이다.
“차관도입에 따른 커미션의 출처와 분배방식 등 누가 자료를 제공했는지 출처만 대면 당신은 죄가 없다”며 회유와 협박을 했다. 10여일 곤욕을 치렀다. 후유증은 컸다. 연행자는 공동집필자인 박창래 기자를 비롯한 10여 명. 신동아 주간 홍승면씨와 손세일 부장은 ‘차관사건’으로 다뤄지다가 ‘북괴와 중소분쟁’이라는 외부 기고를 빌미로 구속 수감되고 사표를 구치소에서 받아갔다. 동아 발행인은 김상만 부사장에서 고재욱 사장으로 바뀌었고, 천관우 주필을 해임시켰다. 김 회우는 ‘동아연감’을 만들던 출판부 차장으로 전보되어 사표를 내고 보름 간 출근하지 않았다.
그 뒤 편집국 기사 기획과 광고 판매 등을 조율하던 기획부장을 끝으로 1975년 동아 언론자유투쟁으로 해직됐으나 ‘동아투위’ 멤버는 아니었다. 해직되고 살길이 막막했다. 1959년 경향 폐간 때는 혈기왕성한 스물다섯 살이지만, 75년 동아해직 때는 마흔 두 살. 노모와 처, 그리고 삼남매(2남1녀), 여름이라 연탄걱정을 덜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해 친정인 경향신문에서 오라고 해 논설위원과 통일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을 끝으로 22년간의 언론계를 마감한다.
고향서 야당의원 두 번 당선
-정계 입문은?
“1980년 다방에서 민주한국당(민한당) 창당 준비를 하던 유치송(柳致松) 씨를 우연히 만났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기에 놀고 있다고 했죠. 부안에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출마하라고 해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 됐습니다. 민한당 전북도당위원장과 당 대변인을 지냈으나 12대 총선 때는 고배를 마셨죠.”
-1996년 15대 총선 때는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으로 당선됐지요?
“그렇습니다. 그에 앞서 1987년 대선 때는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선전본부장을 맡았어요. 집사람이 보라매공원 김대중 집회에 나오다 버스에 치여 세상을 뜬데다 집까지 날려 공황상태였어요. 이듬해 DJ가 공천 제의를 했으나 경황도 없고 기운이 빠져 사양했지요. 12년 놀다보니 국회의원을 다시하고 싶어 공천해달라고 하니 하랄 때는 안한다더니 나 혼자 정하는 것도 아니고 난색을 표하다가 공천을 받게 돼 재선으로 활동 했습니다” 15대를 끝으로 탈당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그 뒤 농수산물유통공사(aT) 사장을 지냈다. 양재동 15층 사옥은 사장 재임 중 준공했다.
부인(신형순)이 타계한지 3년, 1990년 장정숙 씨와 재혼했다. 새로 맞은 부인은 14세 연하로 초혼이다. 진명여고를 나와 진명여고 행정실에서만 38년 근무했다. 울진이 고향으로 ‘영호남의 결합’이라며 웃는다. 단아하고 젊은 모습의 의문이 풀렸다. “살림살이와 집필 뒷바라지를 해주는 집사람이 시종여일 고맙다”고 한다.
산을 좋아하는 김 회우는 1955년 고대산악회 결성에 앞장섰고, 한국산악회 자문위원과 평생회원으로 ‘2007 한국 에베레스트 실버 원정대’ 산파역을 맡았다. 60대 산악인 2명이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정상(8,848m)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고, 김 회우는 부인과 함께 5,400m 베이스캠프까지 올랐다. 귀가 약간 멀어 불편할 뿐 폐암 수술 이후 복용하는 약 없이 건강을 유지한다. 인터뷰를 마친 뒤 약속이 있다며 가파른 지하철 계단을 가뿐하게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