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노인이란 닉네임의 시인 李學周 회원은 34년생이니 올해 80세, 그러나 나이는 상관없다.
白民이란 호에 걸맞게 흰머리가 가득하지만 열정은 불같다.
처음 만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흰머리에 검은 눈, 불빛 담은 시선, 거침없는 말 때문이었다.
지난해 그러니까 79살에 문단에 등단해서 시인이 됐단다.
그것도 두 군 데 문예지에서 詩로 추천을 받았다니 그 자체로 특이하다.
현재 18개 문인단체에 참여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왕성한 詩작업을 하는 그가 놀랍기만 하다. 문학여행을 즐기고 식도락도 즐기며 노년을 열정으로 태운다. 문예복지재단의 창작지원금을 받아 곧 시집도 출간할 계획이다. 이쯤해서 이회우의 詩세계를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요즘 날씨와 못된 정치판을 보고 그대로 갈겨썼다는 <오! 하늘마저 왜 이러십니까?>라는 제목의 詩를 소개한다.
-오! 하늘이시어 왜 이러십니까?/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 보기 싫어서
물벼락 불볕더위 잇달아 퍼부어/숱한 생명 죽어가고 있습니다.
정치하는 꼬락서니 기가 막혀서/탈세하는 재벌 양심 가증스러워
나랏일 한답시고 혈세나 빼먹는/도둑놈 심보 같은 공무쟁이들
민생은 굶주려 죽거나 말거나/검은 돈 훔쳐 먹기 시뻘건 눈알
패거리 싸움질에 피투성이가 된/난장판 여의도가 역겨웠나요
하략… -
詩語의 내뱉음에 정말 거침이 없다.
땡볕이 무서운 날 오포읍 능평리 자택을 찾았다. 산속의 자택은 넓은 대지에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별장 분위기다.
따가운 햇살이 겁나 얼른 마루로 올라서며 흘깃 보니 정원의 잔디는 멋대로 자라 이발한 지 반 년은 넘은 머리 형국이고 들깻잎은 꽃나무를 덮고 수북하게 자랐다.
중학교때 월반으로 고교진학
뒤에 선 사모님의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 들깨 뽑았어야 하는데...”
손님이 보게 돼서 민망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류주순 사모님은 이회우보다 두 살 아래시다. 경상도 상주 양반 댁 따님으로 곱게 자라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서울로 시집와서 고생 많으셨다고 했다. 과일과 커피를 내오시는 사모님의 굽은 허리가 안쓰러워 보였다. 거실 소파에 마주 앉았다. 산골이라서 인지 선풍기 바람이 참 시원했다.
-자기소개부터 해주시지요.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는데 집안이 어려워 초등학교 때 인천으로 이사를 했고 어머님이 노점상으로 가계를 꾸렸어요. 아버님은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으셨고 어머님이 고생 많이 하셨어요.
처음 인천에서 전깃불을 봤는데 신기했어요. 꺼보려고 입으로 후후하고 불었더니 외6촌 동생이 바보라고 놀리며 손으로 스위치를 돌려 끄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촌놈이란 놀림을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공부는 잘하셨지요.
“인천중학교를 다니다 1년 월반해서 바로 인천고등학교에 입학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 3반 때 친구 중 하나가 KBS 사장을 지낸 홍모씨예요. 고교 졸업하고 서울대 낙방하고 성균관대학교로 진학했지요.
대학시절 성대신문 기자로도 활동 했구요.”
야당 정치인으로 ‘헛발질’
이회우는 대학 다닐 때인 1955년부터 정치활동을 했고 10여 년 동안 야당정치인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회한의 시기였다는 회고담을 이회우의 <나의 헛발질 10년>이란 글을 통해 들어 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랐던 시절. 1955년 대학 2학년 때 어느 정치 교수의 꾐에 빠져 4사5입 개헌에 반대하고 범야세력의 신당창당에 학생 대표로 참여했습니다. 해공 신익희, 유석 조병옥, 장면 박사 등이 범야 지도자들이셨지요. 민주당 경기도당 총무간사였을 때입니다. 해공 선생이 호남 유세 중 서거하시어 유해가 서울로 돌아오실 때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를 외치는 군중데모가 벌어졌어요. 이때 해공의 비서였던 유치송씨 등과 함께 앞장섰습니다. 이 사건이 5․5소요사건인데 주동자로 지명수배를 당하는 얼간이가 되었습니다.
배고픈 야당 생활 10년 헛발질만하고 금쪽같은 인생을 낭비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런 인연으로 결혼식 때는 유석 조병옥 박사가 주례를 맡았고 4․19에 이어 민주당 장면 정권이 들어서면서 잠깐 햇볕 속에 갇힌다. 28살 때였다.
이회우 내외는 용두동 판잣집에 세 살고 있었는데 청탁하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왔고 어떤 이는 돈이 든 사과 궤짝을 들이밀기도 했었고, 또 어떤이는 28살 짜리 보고 영감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때를 회상하며 이 회우는 “배고프면 소금이라도 먹는다지만 배고프고 가난한데 돈 싸들고 찾아오니 거절하기가 무척 힘들더라구요.”라고 털어 놓았다.
5․16이 터지면서 또 지명수배자가 되었다. 어려운 삶이 지속됐다.
시장에서 여러 가지 장사를 했으나 연달아 실패했고 해수욕장에 가서 방갈로 사업도 했으나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
생활이 막막해 진 사모님이 팔 걷고 나섰다. 교직 경험을 살려 産暇교사(산후 휴가 중인 여교사를 대신하는 임시 교사)로 이 학교 저 학교로 옮겨 다니며 일하는 등의 어려운 시절을 겪었다.
-어떻게 해서 기자가 되셨나요?
“실업자의 따분하고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일간지에서 국방부가 전우신문 기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봤어요. 대학신문 기자 경력 덕에 합격했던 것 같구요. 1966년 12월이었습니다. 편집기자로 일했어요.”
- 전우신문 기자생활은 어땠습니까?
“타성에 젖은 신문 편집. 그저 월급쟁이의 생활이었지요. 입사 다음해인 1967년 1월9일 당포함(5.6함) 사건이 터졌어요. 당포함 사건이란 46년 전 동해상에서 어선들의 어로지도를 하고 있던 우리 해군 함정을 북한이 해안포로 공격해 침몰시키고 해군 39명의 젊은 생명을 앗아간 사건이지요. 우리는 46년 전 그 때 당포함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또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46명의 해군을 전사하게 만들었지요.”
전우신문 거쳐 한국경제로
“또 전우신문 편집실에서 당포함이 침몰하는 사진을 봤어요. 함체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꼬리의 5자와 6자만 보이는 장면이 특히 뇌리에 박혀 弔詩를 한줄 썼어요. 문화부장이 보고는 ‘이기자 시가 좋네요’ 라더니 함께 일하자고 해서 문화부 기자가 됐어요.”
-한국경제신문 기자와 부장을 하셨지요.
“전우신문사와 한국경제신문사가 한 건물에 있었어요. 그게 인연이 돼서 한국경제신문 편집부 차장, 사회부 차장, 편집부장, 특집부장 등을 맡았어요. 주간지 일요신문 담당 편집부장으로 일하면서 신문이 팔리게 하려면 3S(Sex. Sports, Screen)를 살려야 한다고 위에서 강요했지만 먹혀들지 않았어요. 요즘 방송, 신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시청률 높이고 독자 모으려고 별짓을 다하는 것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나고는 합니다.
기자 생활 15년은 나름대로 편안했고 보람 있었던 시절이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경제신문은 왜 그만 두셨어요.
“그만 둔 게 아니라 잘렸지요. 1980년 12․12 이후 서울시청 지하벙커로 기사 검열을 자주 받으러 갔고 돌출 질문을 몇 번인가 했더니 군부에서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아요. 검열에 참여했던 이 모 대령이 81년에 한국경제신문 전무로 오더니 사표를 내라데요.”
신문사를 그만 둔 이 회우는 또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하고 살기는 어려워 졌다.
그러다가 1982년 1월에 새마을금고연합회 홍보실장으로 새 일을 시작했다. 기자 경력자를 홍보요원으로 발탁하라는 당시 서정화 내무장관의 지시의 결과이니 기자 경력의 덕분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홍보실장 자리에서 직위해제 된 일도 있었다구요.
“전경환 한테 밉보여서 그랬어요. 전씨의 새마을행사 연설문원고를 마감 시간 때문에 새마을금고 연합회보에 싣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런데 노태우씨의 6‧29선언 이후에 복직 시켜 주더라구요. 취재하고 글쓰고 새마을 금고 25년사도 편찬하고 정말 바쁘고 신명나게 일 했습니다.”
이 회우의 삶은 그 자체로 드라마요 장편 소설이었다. 새마을금고 대구시 사무국장, 서울시지부 사무국장, 경기도지부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정년퇴임했다. 정년퇴임은 일생에 단 한번이었다.
서울시지부 사무국장을 하면서 고건시장에 대든 이야기하며 후배들로부터 금관 선물을 받은 이야기 등은 줄인다.
이 회우가 주인공인 소설이야기는 마치고 이제 늙은 시인이 된 이회우의 詩 세계를 돌아본다.
지난해 등단한 이 회우는 하루 세 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하루에 세 편을 쓰다니 정말 믿기 힘든 일이다. 이 시인의 시는 직선적이고 거침이 없고 열정적이며 풍자 또한 화끈하다.
<전 봇 대>라는 시 한 편 더 옮겨 싣는다.
- 내가 어느 날 술 한 잔 걸치고/몽롱하게 취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로변에 오만하게 서있는 너를 보고/
굴종하지 않는 너의 무례를 응징하기 위해/평양 박치기로 냅다 들이 받았지만/ 나는 쓰러졌는데 /너는 나를 내려다보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너를 보면 주눅이 든다./세상 겁 없이 깡다구로 살아왔지만/내 박치기 한방에 안 떨어진 놈 없었는데… 하략-
이 회우는 시가 신난다. 상주서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 잡지에 글 싣고 공책도 받고 크레용도 받았던 추억이 요즘 활기차게 되살아났다.
詩가 희열을 가져다준다는 이회우를 사모님이 詩가 밥 먹여 주느냐고 타박도 하지만 그래도 시가 좋은 걸 어떡 하냐고 크게 웃는다.
이회우의 전원주택 주변은 온 통 나무로 덮인 산이다. 이 가운데 휴경지 500여평을 개간해서 오이, 호박, 고추, 토마토, 감자, 고구마, 파, 마늘, 그리고 더덕까지 온갖 작물을 심고 가꾼다.
농사일은 부인이 도맡는 셈
이 회우는 詩쓰느라고 컴퓨터 앞에 있을 때가 많아 농삿일은 허리 굽은 사모님 류 여사 몫이 될때가 훨씬 많다.
그래도 이회우가 훨씬 더 바쁘긴 하다. 詩쓰기 말고도 문학 모임에 참여해야 하고 복지회관 가서 헬스도 하고 바둑도 두어야 한다. 500원 짜리 기계 마사지도 받아야 한다. 물론 친구들도 만나야 한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물었다.
-요즘 기자와 언론을 어떻게 보세요.
“취재하고 보도하는 것은 산삼 캐는 자세로 해야 하는 데 요즘 너무 쉽게 쓰고 멋대로 말하는 것 같아요. 잘못된 정보가 얼마나 큰 독이 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정확하게 취재하고 바르게 보도하는 사실화 작업에 올인 해야지 지금 같으면 모르고 그대로 믿는 사람들에게 큰 죄를 짓는 거예요.
전주이씨 후손으로 효령대군파인 이 회우는 종친회인 사단법인 淸權祠(청권사)의 이사장 직무대행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