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한창 살 나이에 이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인가. 장창영 회우가 졸지에 이승을 떠나고 보니 그 자리가 그렇게 넓어 보일수가 없다.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에서 태어나 6·25전쟁 전 형님을 따라 월남했던 고인은 1953년 속초중학교와 속초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진학했다. 학도병으로 군에가 제대할 무렵엔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져 복학을 포기했던 그였다. 고인은 경향신문 기자로서 언론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잘 알려진 바와같이 당시 경향신문은 D일보와 함께 강력한 야당지 성향을 띄고 있었다. 초임기자 시절부터 그는 발로 쓰는 기자의 전형적인 스타일이 었다. 60년대 초기 중앙지들이 지방주재기자제도를 실시했는데 그 무렵 고인은 1 기생에 해당하는 기자였다.
고인이 기자생활을 시작할 때 동해안에서는 예기치 못한 대형사진들이 자주 발생하여 취재진을 긴장시켰던 시절이다. 여름철 성어기에는 이른바 휴전선 근해까지 올라가는 꽁치·오징어잡이 어선들이 북한에 납치되는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는가 하면 겨울철이면 한류를 따라 남하는 명태 떼가 어로저지선을 넘어 내려오는 바람에 휴전선 남쪽 동해 부분 해역에는 동해안 어선들은 물론 남해안어선들까지 몰려들어 명태잡이를 하곤 해서 휴전선 근해어장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던 때였다. 그 런 기회를 노려 북한은 어선납북의 만행을 자행하곤 했었다.
고인은 그 후 중앙일보 창간과 함께 경향신문에서 이적했고 60년 중반이후 부터는 동해안지역에서 발생한 사건 현장에는 정말 악착같이 발로 뛰던 기자였다. 1966년 겨울 한국산악회 히말라야원정, 설악산 조난사고 (죽음의 계곡) 때에는 사고 첫날부터 조난자의 시신 9기가 눈구덩이에서 모두 수습 될 때 까지 10여일을 사건현장을 섭렵하는 등 참으로 끈질긴 기자정신을 발휘했다. 고인은 특히 우리의 해군사상 결코 잊을 수 없는 56(당포 함)함 피격침몰사건, 간첩 조창희( 강릉 공항에서 북한으로 끌고 간 YS 11기 이면 추적사건, 박중국 소좌가 MIG 16기를 몰고 와 고성군 거진읍 송포리 백사장에 불시착, 위장 귀순한 사건, 거진에 은신한 간첩 김상태가 강릉발 서울행 KAL 여객기를 납치 북한으로 가던 중 보안관이 권총으로 범인을 사살 초도리 해안에 불시착시켰던 아슬아슬한 현장 취재, 대진항을 출항 안개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해경 863경비정의 추적 취재(1974년)등 이 모든 사건 현장을 빠짐없이 추적했던 기자가 바로 장창영 기자였다.
고인은 참으로 기자 정신이 투철했던 언론인이었다.
신군부가 들어서자 그는 중앙일보를 마감하고 연합통신으로 이적, 계속 활동하다가 뜻하는 바가 있어 언론계를 떠났다. 그 후 고인은 관광회사인 주식회사 '대명'으로 옮겨가 이사직을 맡아 '속초대명' 을 확장 현대화 하는 계획에 속초대명이 가장 아쉬 워 했던 골프장 공사를 완공하는데 진력 3년 만에 이를 완성하는 등 회사가 희망했던 간절한 숙원사업도 이루어 냈다.
고인은 고향 사랑의 영정도 남달랐다. 지역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고 발 벗고 나서는 등 애향심도 둘 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고인의 모교인 속초고등학교 동창회장(8대)직을 맡아 모교와 동창회의 가교 역활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동문들과 지역사회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졸지에 우리 곁을 떠난 고인의 빈자리가 이렇게 넓은 것은 고인이 남긴 행적이 그만큼 거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인은 비록 이승을 떠났지만 고인의 높은 경륜과 지역사회를 위해 보인 헌신적인 봉사는 우리들에게 값진 귀감으로 길이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