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김후란 회우를 인터뷰한다는 기대가 컸다. 서울 남산에 있는 자연을 사랑하는 ‘文學의 집.서울’을 찾았다. 12월18일 오후 2시의 남산 기슭은 제법 추웠다. 안기부가 있던 곳이라는 선입관 때문인가 조금은 무겁고 버거운 느낌이었다. 주변 나무들의 모습과 문학의 향기가 이름만큼이나 더 아름다워 졌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김후란 이사장은 34년생이라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건강한 모습이었고 품위와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그리고 권위도...
“네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시절 문화부장이 시인 신석초 선생님이셨어요. 신석초 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셔서 ‘현대문학’지에서 시인으로 등단했고 그러면서 기자이자 시인이 되었지요. 신석초 선생께서 후란이란 필명을 지어주시면서 허난설헌 이후 제대로 된 시인이 되라 하시던 기억이 새롭네요.”
김 회우는 시인생각이 펴낸 한국대표명시선 100에 뽑힌 본인의 시집 ‘노트북 연서戀書’ 를 챙겨 주었다.
교장실에 동시 걸리기도
-상투적인 질문을 드리기보다 생각하신 대로 말씀을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 데요.
“중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많이 했구요. 어릴 때 부산에 살 때 였어요. 아버님이 공무원이셨는데 제가 7남매 중 셋째 딸이었지요.
가족들을 모아 놓고 노래자랑도 시키시고 집둘레 달리기도 시키셨어요. 그리고 가족 백일장도 열었는데 그때 제가 ‘자장가’란 동시를 지어서 칭찬을 듣고 언니와 동생들 앞에서 낭송했던 일도 있었답니다.
부산사범 병설 중에 다닐 때는 제가 지은 동시가 교장실에 걸리기도 했었구요.”
-기자가 되신 거는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다닐 때 주요한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종합교양지 <새벽>의 기자를 했고 그게 인연이 돼서 특채로 한국일보 기자가 됐어요. 1957년이었어요. 기자생활이 너무 바빠서 대학복학은 못했고요. 나중에 ‘사회에 기여함으로써 모교를 빛낸 공로’로 명예졸업장을 주더군요.
기자는 발로 뛰어야 한다고 한 장기영 사주의 말이 생생합니다. 그 때는 편집국장을 따라 기자들이 자주 회사를 옮겨 다녔어요. 그래서 서울신문과 경향신문을 거쳐 부산일보 논설위원까지 23년 간 기자생활을 했어요. 부산일보 논설위원 때는 서울에 근무하면서 일주일에 사설 3편과 칼럼 1편씩을 써서 밤기차 편으로 부산 본사에 보내곤 했습니다. 참 열심히 일했어요.
3인의 여기자 종군 취재단
-기자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요?
“1967년 문화부 차장 때 한 달간 월남 전선을 종군 취재했던 일입니다.
동아일보의 박동은 기자 그리고 한국일보의 이영희 기자와 함께 3인의 여기자 종군취재단이었죠.
그 때 취재한 것을 송고하면 1면에 실리고는 했지요. 한번은 헬기타고 군 막사를 방문해 지휘자와 인터뷰도 하고 했는데 우리가 떠난 후에 그 막사가 포격을 받아 날아갔다는 끔찍한 말도 들었어요.
여기자들은 병원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젊은 병사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당시 주월 사령관이 얼마 전 돌아가신 채명신 장군이었어요. 멋지고 품위있는 장군이었어요.
취재를 마치고 귀국할 때 채 사령관께서 고생들 했으니 일본을 거쳐 가는 일반 여객기를 사용하라고 권했으나 한국으로 바로 가는 군용 수송기편을 고집했지요. 수송기 안에서 전사자들의 유골함들이 놓인 모습에 또 가슴이 아팠답니다. 차마 기사로는 쓰지도 못했어요
-1979년 언론 통폐합 때 논설위원을 그만두셨는데 그 뒤로는?
“서울지사가 철수하게 되자 부산으로 와서 근무하라는 회사의 주문이었지만 가정주부로서 그럴 수가 없어 그만 두었지요. 그리고 KBS 라디오의 일일시사칼럼을 썼습니다. 원고지 25매씩을 매일 썼어요. 어쩌다 라디오에 출연했던 게 인연이 돼서 당시 박근주 라디오 본부장이 특별 부탁을 했었거든요.
1983년 정부에서 설립한 여성문제연구기관인 한국여성개발원(현재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원장이 되었다가 원장 직을 맡아 7년간 수행하게 됐습니다.
그 후로 김 회우는 공연윤리위원회, 간행물윤리위원회, 민간방송설립추진위원회 자문위원회위원장, 방송광고공사 공익자금관리위원회 위원장, 정부공직자윤리위 위원 등 공직을 맡았고
2001년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서울>을 창립해서 현재까지 이사장으로 봉직하고 있다. 김 회우가 다음 일정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아 나머지 질문은 이메일로 주고받기로 했다.
다음은 시인(詩人) 김후란의 이야기이다.
김회우가 2007년 ‘문학의 집.서울’ 73호에 직접 쓴 –내 문학의 뿌리와 작품세계-중 일부를 간추림으로 대신한다.
문단사상 최장수 동인활동
“나는 마음속으로 외친다. ‘시를 읽자’ 시를 먹자‘ 가슴에 꽃 피우자’고 그래서 나는 외롭지 않을 수 있다. 문학소녀로 자란 나는 여학교 시절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도 하고 문예부장도 하면서 세계문학전집 독서와 글쓰기에 몰입했고 강한 자석에 이끌리둣 문학 쪽으로 가닥이 잡히게 했다고 할 수 있다. 1963년 여성시인들만의 청미(靑眉)동인회를 결성하여 오늘까지 우리 문단 사상 최장수 동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서로가 성숙해 가는 문학적 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나는 50여년 문학생활에 11권의 시집을 상재하였다. 시로서 소화하지 못한 정력을 적지 않은 산문집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나의 시는 대체로 존재의 확충 의욕에서 발아發芽하고 있다고 하겠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내부의 충동에 의해 시를 쓰고 있다. 이러한 충동이 있는 동안 나는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항시 젊은 정신으로 의욕적으로 시를 쓸 것이다.“
이어진 이메일 인터뷰 내용이다. 질문은 생략했다.
“주말만 제하고는 매일아침 남산자락에 있는 문학의 집으로 출근합니다. 평생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을 병행해 온 탓으로 습관적인 생활패턴입니다. 시간이 맞으면 외부행사에도 나가고 문학창작활동의 숙제도 하고...... 아직까지는 건강합니다. 걷는 걸 좋아하고 이것이 운동이 된다고나 할까요.
아들이 둘인데 큰 아들네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손주가 남매인데 이제 다 커서 성인들만의 가족구성이지요. 가족백일장을 하기 엔 인원이 적어서 못하고 평소 책을 많이 읽는 분위기 조성이 그들에게 도움은 되었겠지요.
작은 아들은 역시 남매를 두고 있고 10여년 째 스위스에 살고 있는데
오래전에 서울에서 간행되는 문예지 ‘시대문학’에서 詩로 등단을 했지요.
2001년 ‘ 문학의 집’ 출범
문학의 집은 2001년 사단법인으로 발족해서 이제 13년차가 됩니다.
내가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으로 있을 때 독일작가들과 심포지엄을 하는데 ‘함부르크문학의 집’에 관한 소개를 받았고 우리도 그런 문학의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지요.
서울시에서 남산자락 예장동에 전 안기부장 공관을 빈 집으로 보존하고 있는걸 알게 되어, 서울시 문화예술국에 우리의 사업계획서를 작성, 건물 사용허가원을 제출했습니다. 고건서울시장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유한킴벌리 문국현사장과 ‘생명의 숲 국민운동’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었고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운동을 하고 있던 유한킴벌리가 주 후원사가 되어주어 문학의 집이 창립되면서 건물을 아름답게 리모델링 해주었지요. 이때 무거운 철대문을 없앴고 지금도 대문이 없어요. 문학을 사랑하는 시민들 누구나 오게 하려는 의도였고 그래서 모든 문학행사는 무료입니다.
문학의 집은 문인들과 시민들의 만남을 통해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확산되고 그렇게 문화적인 사회와 문화국가가 되게 하려는 곳입니다.
실버 파이팅! 소리가 마음으로부터 울려나오게 하는 사회분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월은 무섭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려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가족과 사회에 누를 끼치지 않겠지요. 나 자신 아직까지는 할일이 많다고 하겠고 읽어야할 책도 많고 작품도 열심히 쓰면서 시간을 소중히 가꿔가려 합니다. ‘품위있는 실버문화’가 노령화사회에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어가도록 우리들 자신이 노려해야겠지요.
신앙대학 특강 못잊을 체험
“나는 가톨릭신자인데 아직 신앙생활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만 인간생활이나 정신적인 면에서 정화작용을 해주는 게 종교요 보이지 않는 큰손이 나를 이끌어 준다는 믿음, 이것이 종교의 힘이겠지요.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가장 힘들었던 체험을 들라면… 참 어렵네요. 어떻게 생각하면 작은 행복들이나 시련의 고비들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상사가 아닌가요. 사람 사는 세상에 작은 파도 큰 파도를 겪으면서 사는 게 인생이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언제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오는 행복한 사건이 있긴 있습니다. 그건 나의 일생에 오직 한 번의 체험이었습니다.
2004년 11월, 명동 대성당에서 열린 제 1회 하상신앙대학 강사로 두시간 특강을 했던 일입니다. 가톨릭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송두빈회장)주최로 처음 개설한 기획행사였습니다.
주 1회 열리는데 12명의 초빙강사가 어마어마했어요. 김수환추기경을 비롯해서 당시 정진석대주교(서울대교구장) 최창무대주교(광주대교구장) 차동엽신부(미래사목연구소장)등이 강사로 참여했고 평신도 대표로 노길명교수(고려대)와 시인이며 여성인 김후란이 끼어있었거든요.
주제는 <현대인을 향한 영혼의 울림-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였습니다. 문인 대표로서 그리고 여성대표로 나서야 하는 나의 역할에 부담이 너무 커서 몇번이나 사양하자 나에게 ’문학과 인생‘이라는 강의 제목을 주면서 종교일색보다는 신선한 특강이 되리라는 기대가 크다고 주최 측에서 격려를 해주더군요.
처음 5백명 수강신청을 받기로 했다가 신청자가 쇄도하는 바람에 1천명을 받고 대성당에서 치루는 큰 행사가 되었지요. 문학과 인생, 문학과 종교를 생각하는 강의를 마치고 나왔을 때 친지들에 둘러싸이자 가슴이 훅 더워오면서 ‘아, 다행이다. 무사히 마쳤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지요. 그 순간 나는 말할 수 없는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김 회우가 회사후소(繪事後素)라를 말씀을 주었다.
그림을 그리려면 먼저 흰 바탕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삶의 자세를 생각하게 하는 말이라는 설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