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셋인 溫薺 金官泰 원로회우는 “스물세 살”이라고 말한다. “소피보고 털다가도 염라대왕이 부르면 가야할 나이”라 나이를 잊고 산다는 것. 지난 14일 프레스센터에서 만나 사진 찍고 가까운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터뷰 자료는 언론인 인명사전의 간략한 약력이 전부.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낼까 조바심 난다. 자리를 잡자 말 머리를 잡았더니 “술이나 한 잔 마시고 애기하자”며 여유를 부린다. 음주가 화두가 됐다.
-주량은 얼마나 되나요?
“마실 때까지 마시죠” 우문현답이다.
-소주는 몇 병 드시는지?
“술병을 세면서 마시나요” 선문답 같다.
술을 좋아하지만 술친구가 하나둘씩 타계해 마실 기회가 줄어든다고 한다. 본회 문화탐방 때는 지연흥 원로회우가 대작 상대라는 것. 술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으니 술은 힘이 세다. 1968년 서울신문 기획부장 시절, 윤전기 구입 때다. 일본 동경제작소 담당자와 서울에서 밤새 술을 마셨다. 그들의 음주 절차에 맞춰 맥주로 시작하여 정종서 위스키까지 통음을 했다. “일본서 술 좀 마신다”고 큰 소리 치기에 “내기에 지면 10만 달러 깎아주겠느냐”고 농담 삼아 제의하니 “좋다”고 응수한다. 헤어진 다음 날 출근하여 회사부근 K호텔에 찾아가니 골아 떨어져 자고 있었다. “불문율도 약속이니 지키라고 해 10만 달러 깎았다”고 한다. 인터뷰를 하며 각 1병씩 마시고 한 병 더 하자는 걸 사양했다.
-담배는?
“기관지 이상으로 끊었어요. 폐도 3분의 2는 없습니다. 건강 검진 때 의사가 ‘고생 많이 하셨네요’ 하더군요. 해운대서 신분증을 없애고 죽으려고 했었죠. 막상 자살을 하려니 죽지도 않고 불구나 식물인간이 되면 가족들이 더 고생할 것 같아 포기 했어요.” 그 뒤 삶에 대한 애착이 더 생겨 담배는 끊었다. 금연 후 몸이 불어 양복 여러 벌을 새로 맞췄다고 한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안 합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게 운동이지요”
서울 본토 발음으로 존칭어를 꼬박꼬박 쓴다.
박물관 도슨트(docent)로 봉사활동
김 회우는 나이를 잊을 만큼 봉사하며 바쁘게 산다. 수원 화성박물관에서 유물해설과 안내를 마치고 서둘러 귀경했다. 2002년부터 박물관 도슨트(docent)로 봉사활동을 한다. 도슨트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지식을 갖춘 안내인이다. ‘가르치다’라는 뜻의 라틴어 ‘docere’에서 유래한 용어다. 1845년 영국에서 처음 생긴 뒤, 1907년 미국에 이어 세계 각국으로 확산됐다. 우리나라는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처음 도입했다.
-도슨트는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데, 계기가 있었습니까?
“유럽여행 때 머리 허연 노신사가 느릿느릿 걸으며 박물관 전시물을 해설해주고 미술작품의 배경 설명을 깊이 있고 친절하게 안내하는걸 보고 참 멋있구나 감명 받았어요. 아내가 당신도 경로당 같은데 가지 말고 저런 것 한번 해보라고 권하더군요”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88올림픽 때 일본어 통역 자원봉사가 단초가 됐습니다. 2002월드컵 때도 일본어통역을 한 뒤 그 해 9월 개관한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도슨트를 공모하기에 응모했습니다. 안내를 하면서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어요”
-수원 화성박물관과 서울 역사박물관외에도 나가시는 곳이 있으신지요?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을 포함, 네 곳에서 활동합니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3년 6개월 동안 안내를 맡았었고,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도 1년 정도 일했으나 좌편향 인사들과 코드가 안 맞아 그만뒀습니다.”
김 회우의 일정은 빡빡하다. 월 화 금 일요일은 수원 화성박물관, 수요일 오전 서울 역사박물관, 토요일 오전은 국립고궁박물관, 수 목 토요일 오후는 국립민속박물관을 오가며 관람객들을 만난다.
-봉사 활동비는 전혀 없는지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은 점심을 제공하고 있으나 다른 곳은 당일 8,000원씩 줍니다. 초창기에는 점심 제공에 1만원 지하철 승차권을 지급했어요. 경로우대가 생기면서 점심(시청 구내식당 2,800원), 커피한 잔, 담배 한 값, 왕복 버스비를 제공했습니다.”
살면서 받은 혜택 되돌려 준다는 정신
-어려운 점은?
“가끔 엉뚱한 질문을 받거나 모르는 걸 물으면 당황스럽죠. “어린이들이 별은 원형으로 빛나는 데 왜 오각형으로 그리죠?” 한다던가, 사차원적인 질문을 하는 아이들이 가끔 있어요. 올해는 ‘청마 띠'에 관련된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래서 도슨트는 늘 공부하면서 안내하고, 안내하면서 많이 배우게 돼요” 문화재 관련 지식뿐 아니라 일반상식 등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관련서적을 구입하여 탐독하고 알게 된 지식을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다 보면 완벽히 자신의 지식이 되어 뿌듯하다. “장맛은 묵을수록 좋다”며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입김이 가장 센 시대가 언제일 것 같아요” 반문한다.
“월급이 온라인으로 아내에게 입금되던 때부터가 아닐까요”
“고려시대 때 여성의 입김이 가장 강했죠. 권력도 뒤에서 좌지우지 했어요. 혼례식도 신부집에서 치러 ‘장가 간다’는 말이 생긴 겁니다. 모계사회죠. 결혼 후에 처가살이를 한 것도 흠이 아니었고, 아버지 성 보다 어머니 성을 따르기도 했어요. 장인장모가 죽은 뒤 재산을 상속받아 독립했어요” ‘조선시대 여인사’를 거쳐 ‘현대의 여성상위 현상’까지 사례를 풀어놓는다.
-보람은?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도슨트가 적성에 맞기도 하고요. 국가와 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살면서 받은 혜택을 되돌려 준다는 정신으로 힘닿는 데까지 봉사할 생각입니다”
“얼굴이 이력서, 한 번도 써 본적 없다”
-언론계는 언제 입문했는지요?
“6․25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2년 국방부 연락장교실에서 복무했어요. 사무실은 경남도청에 있었고, 출입기자들과 가깝게 지냈어요. 제대가 가까워 질 무렵 국회를 출입하던 평화신문 김진형 기자가 “제대하면 뭘 할 거냐”고 묻기에 “서울에 가봐야 안다”고 대답했지요. 대뜸 “신문기자 안 해 볼래”하더군요. 그래서 제대와 동시에 평화신문 속기사로 특채 됐어요”
9․28서울수복 후에도 AP통신 등 외신과 국내신문이 부산에 머물 때 평화신문이 가장 먼저 서울에 올라와 타블로이드 두 페이지를 발행했다. 편집국은 정치부, 사회부, 종군기자, 체육부 등 4∼5개 부서에 불과했고, 인원도 10여 명 정도. 김 회우는 일본 단파방송을 통해 해외 소식을 듣고 내용을 속기하여 기사화 했으니 외신기자 역할이다. 철도학교를 다닐 때 속기사 자격증을 따 놓은 게 군대와 사회에서 톡톡히 효과를 봤다고 한다.
김 원로회우는 군에서도 속기사로 복무했다. 6․25참전 용사들의 생생한 수기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대한언론인회, 도서출판 태봉․2013년) 김관태 편 ‘전투부대 못지않은 역할’에서 밝혔듯이 6․25전쟁 당시 16일간의 단기교육을 받고 육군본부 법무감실에 배치됐다. 속기사 자격증 덕분이다. 매일 정신없이 진행되는 군법회의 입회서기로 수많은 재판의 기록을 남겼다. 1951년 발췌개헌 파동 때 국회의원 재판, 판문점 휴전회담 때 납북자 명단 작성 등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의 현장을 기록했다. 속기사는 요즘도 국회에 가장 많이 취업해 있고 영어 속기사들의 활동 폭이 늘고 있다고 한다.
당시 속기사가 드문 탓에 신문사에서는 기자 월급은 제 때 못 줘도 속기사 월급은 꼬박꼬박 챙겨줬다는 것. 외신기사를 다룬 것을 계기로 교통부, 국방부, 시경 등을 출입하며 사회부 기자로 현장을 누볐다. 그 뒤 한국일보, 중앙일보, 세계통신, 자유신문에서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다.
-신문사를 자주 옮긴 이유라도?
“수복 직후 한국 언론계의 흐름이었습니다. 어느 날 다른 신문사 시경 캡이 “너 우리 회사 안 올래”하면 입사가 결정됐어요. 신문사 여러 곳을 옮겼지만 이력서와 사표를 써 본적이 없으니 얼굴이 이력서였죠. 월급 받으며 도장도 찍어 본적이 없어요. 급사가 월급봉투를 가져다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는 “다니던 신문사 가운데 한국일보와 서울신문만 제외하고 모두 문을 닫은 것이 공통점”이라며 씁쓸하게 웃는다.
-서울신문은 사업부 쪽인데요?
“신문사를 떠나 잠시 쉬고 있을 때 지인의 추천으로 서울신문 기획부장을 맡았어요. 첫 임무가 윤전기 도입이었지요. 외자도입서 통관과 조립까지 책임을 맡았습니다. 다른 신문사서 윤전기 한 대 들여와 한 달 간 조립하면서 사람이 다치기도 했는데 서울신문사는 두 대를 들여와 한 달 만에 거뜬히 조립하는 성과를 거뒀어요.”
그 공로로 창간기념식 때 표창장과 함께 상금 1만원을 받았다. “누굴 거지로 아느냐”고 화를 벌컥 냈다. 장태화 사장이 그 소리를 들었다. 궂은 일 하던 직원에게 상금을 준 뒤 그만 둔다며 동네병원에 입원했다. 그 때 일본 동경기계에서 초청장이 왔다. 渡日 준비를 하는데 신문사에서 연락이 와 사업국장 자리를 줄 테니 가지 말라고 해서 팔자에 없는 사업국장을 맡았다고 한다.
언론계 떠나 호텔영업상무 사업까지
-언론계는 언제 떠났습니까?
“1972년입니다. 서울신문 유한열 정치부 차장이 인천 올림포스호텔 사장으로 가게 됐다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고 영업담당 상무로 갔습니다.” 입사 3개월 만에 일본 관광객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객실이 꽉찼다. 운도 좋았지만 기자 시절 창립을 도와줬던 여행사에서 많은 지원을 해준 덕분이다. 적자에 허덕이던 호텔이 흑자로 돌아섰다. 8년여 근무하다 1981년 그만 뒀다. ‘김관태가 호텔 신화를 창조했다. 그가 들어와 흥했고, 그가 나가면서 망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호텔을 그만 둔 뒤는?
“산전수전에 공중전을 겪었죠. 어묵공장을 운영했으나 7개월 만에 1억 원을 까먹고, 회사도 차려보고 번듯한 식당도 운영해 봤어요. 영동에서는 다섯 손가락 꼽히는 시설에 고급 승용차를 몰고 오는 손님들이 즐비할 정도로 성업했으나 사업이 망하면서 돈 버는 것은 팔자에 없는가 보다 생각하며 마음을 비웠다”고 회고한다.
1991년부터 5년 동안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威海)에 있는 榮成市人民政府 경제고문과 다렌(大連)에 있는 복장회사(100% 일본 수출․제1, 제2 공장에 종업원 1,000여명) 상담역을 맡기도 기도 했다.
저서로 ‘4월 혁명-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1960년 김관태 곽인효 위상욱 조덕송 공저) 등이 있다. 환갑 나이를 뺀 ‘스물셋 열혈 청년 김관태’는 “활동할 공간이 있고, 도슨트에 보람을 느끼며, 봉사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봉사하는 삶은 아름답다.
"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제 주위에는 항상 저를 아껴주시고 도와주시며 격려해 주신 분들 뿐이었으니까요…" 김회우의 마지막 멘트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었다.
1961년 중매로 만난 부인 全永吉(75) 여사 사이에 자영업을 하는 장남 榮俊(50) 씨와 인테리어를 전공한 장녀 鉉庭(49) 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