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서 이뤄진 남북이산가족 상봉에 즈음해서 이종기 회우의 자택을 방문했다. 3대 7식구가 한 집에 사신다는 말씀을 듣고 인터뷰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 회우는 청진이 고향이다. 1․4후퇴 때 홀로 남하해 파란의 세월을 지냈다. 고생도 했고 성공도 했으나 언제나 잊혀 지지 않는 것이 고향이다. “이미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님과 돌아가셨을 어머님 그리고 생사를 알 수 없는 그 때는 어렸던 두 동생의 모습이 6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특히 천마산 꼭대기에 있던 청진 제2중학시절이 그립고 옛 동무들 모습도 아른거립니다.”라는 이 회우에게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을 지켜보는 소감을 물었다.
“이번에 저도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하긴 했어요. 그러나 사실상 가족을 만날 기회는 이미 늦었고 가능성도 없다고 봐요. 어머님은 물론이고 동생들도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조카들 만이라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고 부모님과 형제들의 산소와 제삿날이라도 알았으면 합니다."
이산가족 상봉은 이 회우에게 남다른 생각들을 떠오르게 한다.
기자시절 13년간 판문점을 출입하면서 동향(同鄕)출신의 북한 기자를 만나 고향 소식을 귀동냥 하던 시절이 있었고 1990년 10월에는 북한 땅 평양을 방문하는 뜻 깊은 일도 있었다. 제2차 남북고위(총리)회담의 평양 취재단 명단에 서울신문 이종기 사진부 부국장이 들어 있었다.
남북고위회담을 취재하고 귀환한 이 회우는 그 때 일을 사진기자회보에 실었다. 그 글의 일부를 요약해서 옮긴다.
< 판문점에서 가족의 소식을 전해주던 북한 기자를 평양의 만찬장에서 만났다. 어머님은 고향에 계셔 만날 수 없고 평양에 있는 동생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귀띔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 기자 편에 가지고 간 선물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평양 체류 3박 4일 동안 낮에는 여러 가지 스케줄에 맞추고 취재와 전송을 하느라고 여유가 없었지만 밤이 되면 마음은 어머님에게로 달려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대신 가까이 있다는 동생이라도 만났으면…
서울로 돌아오는 날 평양역에 도착한 내게 쇼핑백을 건네주는 사람이 있었다. 이게 뭐냐고 묻자 동생의 선물이라며 저쪽을 손가락질 해 보였다.
역 근처 건물 2층 창에서 마구 손을 흔드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동생이었다. 순간 자제력을 잃고 뛰어가려 하자. 주변에서 만류했다. “기차를 타야 할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차는 평양을 떠났다.
“아” 어머니! 당신은 알고나 계신지요. 제 가슴이 이리도 고통스러운데 당신의 아픔은 얼마나 크실지…제발 오래 살아 계십시오. 도저히 이대로 마지막 일수는 없지 않습니까!>
남북대화를 취재하면서 대화해서 뭘 하나 하는 회의를 느끼기도 했었다는 이 회우는 이 글의 말미에서 “남북대화는 계속해야 한다. 아무 소득이 없을 지라도 자꾸 왕래하다보면 언젠가는 아주 조금이라도 트일 것이다.” 라고 힘 주어 말했다.
이 회우는 청진에서 양복점을 경영하시던 부모님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 한국전쟁 때 18살로 고등학생이었는데 북진한 3사단 18연대의 군 노무자로 일하다가 1․4후퇴로 청진에서 철수할 때 LSD를 타고 월남했다. 다음 달인 2월에 부산에서 육군 신호나팔수 모집에 합격, 육군본부 군악학교 졸업, 육군본부 군악대 3년 복무, 1954년에 제대의 병역을 쌓았다.
-군 제대 후에 어떻게 자리를 잡으셨나요
“제대할 때 21살이었어요. 잠깐 막막했는데 고향 청진에서 피난 온 분들이 여러분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포목점을 하고 계셨습니다. 청진이란 연줄로 포목상을 하시는 분들의 자녀들에게 가정교사를 시작했습니다. 가르치던 아이들의 집을 돌아가며 밥도 얻어먹고 잠도 얻어 자구요. 그러면서 손수레에 원단을 싣고 가게와 창고를 오가는 일도 했습니다. 열심히 일했더니 신임도 얻었고 돈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기자가 되신 거는요.
“자리를 잡고 보니 이제 공부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955년에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때 광화문에서 사진관을 하시던 고향 분을 만나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고 사진 공부를 시작했구요. 한양대 학보사 기자로도 활동을 했습니다. 대학을 마치면서 대한일보의 전신인 평화신문 사진부 기자로 기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59년이었습니다.”
-기자가 되니까 어떠하셨어요.
“날아 갈 것 같았습니다. 이젠 직장도 생겼고 열심히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감이 있었지요. 그 뒤로 대한일보 기자, 경향신문 기자, 서울신문기자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진 기자로 관록을 쌓았습니다.”
“서울신문이 1971년에 야심차게 추진한 사업이었습니다. 金祜燮. 金祺燮 형제를 비롯한 6명의 등반대원과 사진기자인 저를 포함한 서울신문 마나술루 원정대는 예년에 보기 힘든 악천후를 뚫고 두 번 세 번 전진 후퇴를 계속하다가 8,156m의 정상을 350m 앞두고 김기섭 대원이 총알처럼 강한 바람에 휘말려 크레파스에 빠져 한국인으로는 첫 희생이란 사고로 이어졌어요. 정상을 앞두고 발생한 끔찍한 사태였습니다.”
이 회우는 한 묶음의 신문철을 보여주었다. 사고 소식은 물론이고 절경과 눈보라와 「억겁의 비경」이라고 표현한 화면들이 새삼 경이로운 장관이었고 이회우가 직접 쓴 「세계의 지붕 네팔 비경」이란 연속 르포 기사와 사진 설명의 문장들이 필자를 압도했다. 이걸 언제 다 보고 무엇이라고 정리해야 하나 겁이 나기도 했다.
-보여주신 1977년 2월28일자 서울신문의 머리기사 타이틀이 「蘇水域 조업 韓國漁船 撤收」였고 「本社 李鍾基 특파원, 第52大辰號서 急電」이란 부제가 붙어 있네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종기 특파원 사진도 함께 나왔네요.
“대림 수산의 배려로 52 대진호(5.054t)에 승선해서 북양 캄차카 근해에서 명태 잡이 현장을 취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수산청으로부터 급전이 왔습니다. 소련의 2백해리 전관수역선포가 3월1일부터 발효되니 캄차카 근해에서 조업하는 어선들은 남쪽으로 철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보를 받은 우리어선들은 만선의 꿈을 접고 황금 어장을 등져야 하는 통한에 발을 굴렀지요. 2월9일에 부산을 떠났고 본격적인 조업을 한창 시작한 26일에 급전을 받았던 것이지요.“
이 회우는 촬영뿐만 아니라 기사 취재와 작성에도 뛰어나 캄차카 근해서 철수한 뒤 이회우의 르포 기사가 당시 신문에「사진으로 본 마지막 漁撈 이모저모」와 「두고 온 北洋」등의 제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회우가 보여준 옛날 신문에서 이종기 기자의 능력과 열성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특히 사진을 곁들인 「두고 온 북양」은 4월8일부터 25일까지 신문의 1면 박스 기사로 남아 신문 전체의 윤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힘들고 어려운 취재 많이 하셨는데 월남 종군 때 이야기도 해 주셔야지요.
“맹호부대에서 밤을 보내고 있을 때 베트공 들이 철조망으로 습격을 해왔어요. 맹호부대원들이 한 밤에 사격을 해 대는 데 대단했어요. 날이 밝은 뒤 보니 철조망 따라 시체들이 즐비했던 정경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한 번은 수색하는 병사들을 따라 취재를 하는데 길 양쪽은 차들이 다녀 맨 흙이었지만 가운데는 풀이 꽤 자라있었는데 그 속에 숨어 있던 베트공을 내가 발견하고 체포하게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요즘 베트남과의 외교와 교역 관계 등을 보면 느낌이 별나지요. 앞으로 두 나라가 정말 친하게 잘 지냈으면 합니다.
3대에 7식구가 한 아파트에 살면서도 밝고 명랑하며 행복한 생활을 누리는 이회우의 가정은 부럽고 어찌 보면 이해하기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회우 부부와 가족들의 깊은 사랑과 끝없는 신뢰가 바탕이 되었음을 알게 되면 공감이 간다.
-혈혈단신 월남한 총각기자가 결혼은 어떻게 하셨나요.
“경향신문사 수습기자였을 때 동대문 경찰서를 출입했습니다. 수사과장이 말도 걸고 친절도 베풀고 하더니 어느 날 집으로 초대하더라고요. 조카딸이라고 한 처녀를 소개 했고 그 처녀가 지금의 아내입니다.
그 때 제 나이 28살이었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의 말씀에 따랐습니다.
1937년 생으로 이 회우보다 4살 아래인 김희숙 여사는 동대문서 수사과장이 이모부였고 일산의 갑부 집 딸이었습니다. 부인께 질문을 했다.
-수습기자, 이종기 어디가 좋았습니까?
“별루였답니다. 얼굴이 시커멓고 첫인상은 그저 그랬는데 어른들이 좋다고 하셔서 그냥 따랐어요. 그랬더니 그게 복이에요. 딸 둘에 아들 하나 낳고 그 애들이 모두 대학졸업하고 잘 살고 손자 ․ 손녀를 7명이나 두었으니, 그리고 지금도 모두 건강하니 이만한 복이 없지요.”
이 회우는 서울 성북구 북악산로에 있는 우성아파트에 산다. 47평에 방 4인데 이 회우 부부가 방 하나를 쓰고 아들 내외가 또 한 방을 쓴다.
그리고 손녀 둘이 한방을 쓰고 막내 손자가 방 하나를 독차지 하고 있다.
한 가족 7명이 모두 모이는 자리를 마련했고 사진을 찍는 기회로 삼았다.
하나 같이 밝은 표정이고 기뻐하는 모습들이 행복함을 진솔하게 보여 주었다.
중학교 3학년인 손자에게 심술 맞은 질문을 던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 중에 어느 분이 더 좋아요.
잠시 망설이던 손자의 대답이 신중하다. “두 분 다 좋습니다.”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어떤 부분이 좋으신 건가요.
“할아버지는 모든 걸 챙겨주셔서 좋아요. 밥도 해 주시고 여행 갈 때는 짐도 들어주시고 초등학교 때는 학교도 데려다 주셨구요.
할머니는 음식도 다 해주시고… 현명하세요. 두 분 다 무지무지 좋아요.
이 회우 가정이 행복하고 평안한 이유는 간단한 것 같았다. 이 회우 부부가 아들부부와 손자 ․ 손녀들의 대접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먼저 이들을 귀히 여기고 나눠주고 보살펴주기 때문인 것이다.
집안에서 이 회우의 별명은 ‘모든 걸 다해 주는 할아버지’다.
아들이 결혼 하고나서 딴 집 살림을 하다가 불편하다는 판단으로 함께 살기로 했는데 잘한 결정이었다고 이 회우는 스스로 평가한다.
남편이 국장으로 있는 ‘한국아동미술’의 강사로 일하고 있는 며느리도 시부모와 함께 사는 게 불편하지 않다고 한다. 두 분의 도움으로 직장 생활이 훨씬 더 원만하고 편한 면이 많다고 했다.
-시부모를 모시는 게 아무래도 불편하실 것 같은 데요.
“저의 시어머니께서 외동딸이세요. 그래서 40년 동안이나 두 분이 모셨거든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저희는 그것을 봤기 때문에 저희가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또 아이들의 사회성과 조심성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되구요. 가정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키우는 것도 좋은 점이지요. 사랑이 많으시고 뭐든지 도와주려고 하시고 그러니 저희는 늘 고맙고 행복합니다.”
대학생인 큰 손녀에게 물었다.
-7식구가 함께 사는 장점과 단점을 말해 주세요.
“장점은 언제나 허전하지 않고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것이구요. 단점은요 혼자 있고 싶을 때 그러지 못하는 게 좀 그렇구요. 참견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은 아무래도 안 좋아요.”
- 이 회우님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신장이 안 좋았어요. 방광암으로 수술도 3번을 했구요. 그런데 요가를 한 것이 건강에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요즘은 성북구 복지관에서 일주일에 3번 씩 요가를 하구요. 일주임에 2번 이상 정릉 산에 오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아무런 이상도 없고 건강합니다.”
- 여가 시간은 어떻게 보내세요.
“모임과 약속이 많아요. 한 달에 보름 정도는 모임이 있고 심심하면 더 만들어요. 나이는 생각 안하고 삽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이 회우는 재작년에 딸네를 포함한 가족들 모두를 데리고 크루즈 여행을 다녀왔고 올해도 사정이 있는 사람은 빼고 모두 데리고 크루즈 여행할 계획이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님 최고라는 칭찬을 들으며 행복하다는 이 회우의 행복 누리기 비법은 간단했다. “윗사람이 잘해야 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