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천하의 바람둥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그의 일대기에 드러난 여인만 일곱 명이다. 페르낭드 올리비에, 에바 굴,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 마리 테레즈 발테르, 사진작가 도라 마르, 법학도 프랑수아즈 질로, 도자기 공장 점원 자클린 로크 등은 결혼을 했거나 동거한 사이다. 시인 엘뤼아르의 부인 뉘슈 엘뤼아르 등 동거하지 않은 연인들까지 합치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 가운데 두 여자는 피카소를 잊지 못해 자살했고, 두 여자는 지나친 질투와 강박관념으로 정신이상이 됐다. 바람둥이 남편을 유일하게 걷어찬 여인은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의 프랑수아즈 질로였다.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나자 피카소는 자살하겠다고 협박했으나 그녀는 단호하게 뒤돌아보지 않았다.
피카소가 46세 중년 때 작업을 핑계로 유혹한 마리 테레즈 발테르는 미성년자. 앳된 그녀에게 古城을 사주고 밀회를 즐긴 것은 부인 올가 조차 몰랐다. 명작 ‘꿈’의 주인공이 마리 테레즈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뒤였고, ‘꿈’을 계기로 초현실주의로 창작의 지평을 넓혔다.
벌거벗은 매춘부들의 몸을 기하학적으로 해부한 ‘아비뇽의 처녀들’은 입체파 그림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비뇽’은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매춘부들의 집단 거주지로 과거 ‘청량리 588’이나 ‘미아리 택사스’같은 곳이다. 매춘부는 물론 미성년자, 귀부인을 가리지 않고 애정행각을 펼친 피카소의 여성편력은 예술로 승화시켜 무죄인가? 그에게 여성의 육체는 창작이 샘솟는 源泉이었던 것 같다. 샘솟듯 솟구친 정력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 “투우 거시기가 왜 이리 작아”?
‘노인과 바다’ 등 불후의 명작을 남긴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가 18년 연배인 피카소를 만나 물었다.
“당신의 여성편력은 화려하다. 샘솟듯 솟구치는 정력의 비결은 무엇인가?”
“투우의 고장에서 태어나 투우의 거시기를 많이 먹은 탓이오” 피카소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헤밍웨이는 투우 거시기를 판다는 식당에 예약을 한 뒤 잔뜩 기대하고 들렀다. 웨이터가 쟁반에 받쳐 가져온 거시가가 형편 없이 작았다.
“이보게 웨이터, 투우 거시기가 왜 이렇게 작은가?”
“오늘은 투우가 죽지 않고 투우사가 죽었습니다” 웨이터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스페인 여행 때 가이드에게 들은 우스개지만 투우의 거시기는 ‘남자들에게 참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인들이 보신탕집에서 단골에게만 준다는 ‘만년필’처럼. 경기장에서 장렬하게 죽은 투우는 곧바로 가공처리 되며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식도락가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특히 투우의 거시기는 가장 비싸다는 것.
헤밍웨이의 여성편력도 만만찮아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을 했다. 미국 시카고 출생인 그는 에스파냐 내전 때 특파원으로 취재한 적이 있다. 스페인의 풍광에 반해 론다에 머물며 투우를 다룬 소설 ‘오후의 죽음’(1932년)을 집필했다.
파블로 피카소의 고향은 스페인 남부 지중해 연안의 휴양도시 말라가. 그가 두 살 때까지 살았던 생가는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성장하면서 바르셀로나와 바그다드를 거쳐 파리에 정착했다. 투우를 즐긴 피카소는 론다를 자주 찾았기에 두 사람의 조우는 가능했다.
# “투우와 육우, 어떤 소가 더 불행?”
론다는 말라가에서 버스로 세 시간 거리다. 론다의 상징은 누에보 다리. 42년에 걸친 난공사 끝에 완공된 높이 98m의 난간에 기대에 바라보는 타호 협곡은 오금이 저리도록 아찔하다. 협곡 너머로 펼쳐진 너른 들판의 목가적 풍광은 눈길을 시원하게 해준다. 다리를 경계로 옛날 아랍인이 살던 구시가지 라 시우다드와 투우장이 있는 신시가지 엘 메르카디 두 구역으로 나눠진다. 누라보 다리 부근 언덕 위의 하얀 집들은 요정의 집처럼 아름답다. 누에보 다리는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도 등장하고, 그가 머물던 숙소는 5성급 호텔로 바뀌어 몇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라고 한다.
근대 투우의 창설자 프란시스코 로메로가 태어난 곳도 론다. 본래 스페인 투우사들은 말을 타고 소와 대결을 벌였다. 로메로가 ‘무레타’라 불리는 빨간 망토와 칼만 들고 소에게 도전한 것을 시작으로 스페인 투우는 지금 같은 형태로 변화했다.
어느 도시에나 같은 이름인 스페인광장엔 검은 투우 동상이 달려들듯이 앞발을 들고 서있다. 그 옆 바로크 양식의 론다 투우장은 1785년에 지은 스페인 최초의 투우장이었으나 지금은 투우박물관으로 활용한다. 회랑에는 투우사들이 입었던 의상과 투우 포스터와 사진 등을 전시해 놓았다.
스페인의 관광코드였던 투우는 야만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관습이며 동물 학대라는 반대여론에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카탈루냐는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투우사들은 “투우는 4살까지 푸른 초원에서 체력을 단련하며 호강하다가 경기장에서 죽고, 육우는 우리에 갇혀 살만 찌우다 1년 만에 도살되는데 과연 어느 소가 더 불행한가”라고 반문하며 투우 폐지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투우사들에겐 생계가 걸린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