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15일부터 2주일간 다녀온 중남미 여행은 주마간산이었지만 수십세기동안 원시림속에서 명맥을 이어온 마야 ․ 잉카 문명의 유적을 돌아보는 역사기행이었다.
중남미의 역사는 기원전 수세기 부터 정착한 멕시코 중심의 마야족과 남미대륙 안데스 산맥을 따라 자리잡은 잉카족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15세기 서유럽의 작은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멕시코와 남미대륙을 정복하면서 마야․ 잉카제국은 멸망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원시림과 고산지대로 도피하여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마야 ․ 잉카제국은 한때 2천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1백만도 안되는 소수의 원주민으로 남아 있다. 남미대룩이야 말로 세계 어느 곳보다 피정복자의 아픔과 그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곳 인지도 모른다.
‘악마의 목구멍’ 이과수 폭포
이과수 폭포는 남미대륙 중앙에서 남태평양으로 흐르는 이과수강의 중간에서 떨어지는 폭포다. 1억7천만년전 화산폭발에 의한 지각변동으로 생겼다는 이 폭포는 폭이 2킬로미터, 높이 70~80미터의 270여개 물줄기가 쏟아지는 세계최대의 폭포로 알려져 있다.
1 초당 떨어지는 수량이 1천5백에서 2천톤으로 북미의 나이애가라,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보다 많다고 한다.
이 폭포는 주변에 원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살았지만 자연속에 묻혀 있다가 1백여전 산토스 뒤몽이란 사람이 경비행기로 이 위를 지나다 발견, 세상에 알려졌다. 원주민들 사이에 폭포에 관한 많은 신화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악마의 목구멍’이란 별명을 만들어 낸 얘기가 있다. 이과수 강을 건너거나 고기잡이를 하던 원주민들이 떠내려와 물안개를 내뿜는 폭포로 떨어져 수없이 죽어갔고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그러자 원주민들 토속신앙으로 숭배하던 뱀신에게 ‘악마의 목구멍’에 들어가지 않게 해달라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하늘위의 고대도시 ‘마추픽추’
남미대룩 서북부에 위치한 페루는 잉카족이 가장 번성했던 중심지며 사실상 잉카문명의 요람이다. 기원전 수세기부터 이곳에 정착한 잉카족은 15세기 스페인에 정복되기전까지 인구 2천만의 남미 최대의 제국이었다. 그러나 1471년 마지막 왕 파차쿠티가 스페인 정복 군에 피살되면서 잉카제국은 멸망했다. 지금 페루의 수도 리마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세워졌고 잉카제국의 수도는 리마의 동쪽 4백여킬로, 해발 3천4백미터 고산지대에 자리잡은 쿠스코였다. 쿠스코에는 잉카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만 스페인에 의해 파괴되거나 천주교 성당으로 바뀐 곳도 있는 등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이 통치하는 동안 발견되지 않았던 마추픽추는 도시 전체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해발 2천4백미터 고산 정상에 세워진 마추픽추는 백여년전 미국 탐험가 허아럼 빙엄이 발견하기 전까지 밀림으로 덮여 있었다. 리마에서 마추픽추까지 가는데는 꼬박 하루가 걸린다. 리마에서 쿠스코까지 비행기로 2시간, 쿠스코에서 우르밤바까지 자동차로 2시간, 우르밤바에서 마추픽추까지 기차로 2시간 그리고 다시 버스로 꾸불꾸불한 가파른 경사길로 30분을 올라가야 한다. 잉카제국은 왜 이 험난한 산꼭대기에 이도시를 세웠을까. 이 의문에 많은 추측들이 있지만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마추픽추는 기온이 겨울에도 쿠스코보다 따뜻해 왕이 겨울을 지내기 위해 건설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은 모양이다.
‘하늘위의 도시’로 불리는 마추픽추는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깊은 산 정상에 세워졌지만 천명이 넘는 인구가 상주하는 자족 도시였다. 도시 위 아래의 비탈에 계단식 밭을 만들고 샘을 파 수로와 물을 저장하는 못도 여러 곳에 두었다. 사는 집은 물론 곡물을 수확해 저장하는 창고까지 지었다. 쿠스코까지는 물론 다른 마을로 연결되는 80여개 인도를 뚫어 차스키로 불리는 메신저들이 간단한 물건과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마추픽추는 잉카제국이 멸망하면서 주민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4백여년간 밀림속에 묻혀있다가 백여년전 발굴되면서 ‘하늘위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야문명의 본거지—유카탄 반도
멕시코 동쪽의 카리브해로 뻗은 유카탄 반도는 마야문명의 유적이 가장 많고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치첸이트사,
옥스말, 칼라크물, 팔렝게등 4개 도시외에도 원시림 곳곳에 많은 유적과 유품들이 숨겨져있고 지금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이가운데 치첸이트사의 피라미드 ‘엘 카스틸로’(일명 쿠쿨칸)는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도 꼽히는 마야문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이 돌탑은 정방형의 45도 각도로 쌓아 올렸으며 동서남북 4면 91개 계단 총364개, 탑 꼭대기의 신전을 합쳐 365개로 되어 있다. 탑이 서있는 방향이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고 태양력에 따른 사계절과 1년 365일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요즘의 천문학과도 일치하며 쌓아 올린 공법도 고도의 수학과 역학이 응용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한가지 더 신기한 것은 북쪽을 향한 탑 맨아래에 뱀머리가 받치고 있는데, 매년 춘분인 3월21일 탑 오른쪽 그림자가 뱀 머리위로 연결되어 뱀 모양이 완성된다는 것
이다. 탑 꼭대기의 태양신전을 지키는 뱀 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아마 고대 마야족이 태양신과 함께 뱀신도 숭배하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야의 본거지 유카탄 반도에 100여년전 한국 사람들이 발을 들여 놓았다는 흥미로운 얘기가 있어 자세히 들어 보았다. 구한말 1905년 1천여명의 한국인들이 가족이민으로
이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들은 당시 하와이로 많이 가던 노동자들과는 달리 대부분이 양반이거나 상민층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던 ‘황성신문’에 일본인이 낸 이민안내 광고를 보고 수속을밟아 배를 타고 70여일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광고내용과는 달리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농장의 노동자로 팔려 갔고 가족과도 헤어져 참담한 노예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이도 멕시코 정부가 1910년 발표한 노예해방 조치에 따라 이들은 5년만에 노예신분에서 벗어나 원주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정착했다고 한다. 백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민족의 후손들이 우리 성씨를 가지고 지구 반대편 유카탄 반도의 밀림속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역사가 믿어지지 않는다.
카스트로의 나라 -- 쿠바
쿠바는 50년대 초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혁명이후 60년 넘게 1인 독재가 계속되고 있는 사회주의 나라다. 지금은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 라웰 카스트로가 지배하고 있어 ‘카스트로의 나라’로도 불린다.
쿠바는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배로 2시간 거리에 있지만 미국과 60년 넘게 국교가 없는‘가깝고도 먼 사이’다. 60년대초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구 소련의 미사일 기지건설을 봉쇄함으로써 빚어진 미사일 위기이후 ‘적대관계’가 유지되고 있고 미국인들은 관광을 위해 가는 것조차 꺼리는 나라다.
그래서 이번 여행일정에 쿠바가 포함된 것이 조금은 흥미로웠다. 자정넘어 도착한 수도 하바나공항은 다른나라의 공항에 비해 어둡고 워키 토키를 든 제복의 직원들이 많이 깔려
있어 삼엄한 분위기다. 우리 한국 관광객 일행은 명패를 단 안내원을 따라 별 탈없이 입국수속을 끝냈다.
다음날 아침 시작된 하바나 시내관광의 첫번째 방문지는 소설 ‘노인과 바다’로 잘 알려진 미국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집이다. 21년간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던 집에는 가구, 책상, 타이프 라이터, 메모지까지 전시돼있고, 정원에는 즐겨 타던 요트도 갖다 놓았다. 이어 헤밍웨이가 자주 가던 해변의 식당에 가서 그가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했다는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었다.
하바나 시내관광은 혁명기념탑과 신․구시가지를 둘러 보는 것인데, 곳곳에 아르헨티나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초상이 눈에 많이 띄었다. 체 게바라가 쿠바혁명때 카스트로를 도와
백의종군으로 활동했다지만 카스트로 초상보다 많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바나 시내는 폐허나 다름없는 옛날 호화저택과 수리못한 낡은 집들의 전시장 같다. 혁명때 쫓겨난 몇백만의 난민들이 바다건너 미국에서 고향에 다시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쿠바 안내원의 얘기다. 쿠바여행에의 하이라이트가 쿠바와 견원지간인 미국 작가 헤밍웨이의 발자취를 둘러 본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허전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