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결혼풍속은 신라 고려 조선조 개국초기까지 동성혼(同姓婚)이 널리 퍼져 있었다. 왕실은 물론이고 사대부가문(士大夫家門)을 비롯해 서민에 이르기까지 서스름 없이 근친혼(近親婚=8촌이내)이 행해 졌다. 그런데 고려의 숭불정책(崇佛政策)에서 조선조개국과 함께 억불숭유(抑佛崇儒)로 바뀌면서 윤리(倫理)의식의 강화로 동성동본혼(同姓同本婚)이 사라지게 됐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최근 단종(端宗)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친정 안동권씨(安東權氏)의 가계(家系)를 밝힌 15세기 족도(族圖)를 공개 했다. 이 족도의 기록에 근친혼등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내용이 밝혀저 관심을 끄는듯 하다. 하지만 민속자료로는 가치가 있을지 모르나 역사적 연구자료의 내용은 아닌듯 하다. 이 족도는 왕실이나 종부시(宗簿寺)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런류의 기록은 일반에게도 널리 쓰여졌다.
명문(名門)집안이 아니더라도 과거(科擧)에 응시하려면 내외4고조(친가고조, 외가고조, 처가 내외고조)를 기록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고려중엽부터 출세를 하려면 조상을 기록한 가첩(家牒)을 도표식으로 만들어 보관해야 했다. 이를 가승(家乘) 가계도(家系圖=表) 보첩(譜牒)등이라 한다.
그런데 객관적인 표현으로 족도라 한것을 보면 왕실에서 외가의 혈통을 밝혀놓기 위해서인것 같다. 종부시는 고려때 왕실의 보첩(璿源譜)을 맡은 전중성(殿中省)으로 시작해 여러차례 이름은 바뀌지만 왕실의 기구로 조선조에는 종실(宗室)의 잘못을 조사하는, 요즘의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같은 역할까지 담당했다. 그러므로 왕후 가족의 계보를 소상히 파악해 둬야했을 것이다.
특히 내외족(內外族)의 가족관계를 파악하려면 혼인기록은 필수이다. 족보도 부인이 누구의 후손이며 모의 딸임을 명시하고 있다. 당연히 동성혼(同姓婚)은 물론이고 근친혼(近親婚)까지 명확히 나타나 있다. 이 기록에 동성혼은 물론 동성동본(同姓同本) 결혼사례가 7건이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역대 혼인관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조 초기까지 동성동본혼은 물론이고 근친혼까지 널리 이뤄지고 있었다. 신라왕실은 부계(父系) 혈족혼이 13건, 고려때는 51명의 왕비중 13명이 왕의 딸(公主)이었다. 광종(光宗)은 아버지인 태조(太祖)의 딸, 덕종(德宗)은 아버지 현종(顯宗)의 딸, 즉 남매간에 혼인해 왕비가 됐다. 이렇듯 동성혼이나 족내혼(族內婚)은 고려때 매우 성행했다. 이에따른 폐단이 크자 충선왕(忠宣王)때 이르러 먼저 왕실의 동성혼을 금했다.
하지만 이와같은 풍습은 그뒤에도 양반계급은 무론 일반서민층에게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儒敎)의 사상이 들어오면서 불취동성(不娶同姓)의 관습이 자리잡으면서 철칙화(鐵則化)됐다. 이로인해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남여가 일곱 살이 넘으면 자리를 함께 하지않음)이란 원칙까지 내세워 유가(儒家)의 가문을 중심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공자학(孔子學)은 삼국시대부터 유입됐고 고려때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들여와 널리 보급됐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유교(儒敎)는 역사와 학문적 고찰에 그쳤다.
그러다 실천적 변환은 조선조 초기 김종직(金宗直)으로부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로 이어 지면서 거듭된 사화를 거쳣으나 성리학(性理學)이 뿌리를 내렸다. 이에따라 동성동본불혼원칙(同姓同本不婚原則)이 널리 파급됐고 더구나 근친혼은 물론 내혼제(內婚制)가 사라지고 부계혈통(父系血統)의 혼인을 피했다. 얼마전까지도 민법815조가 이를 법으로 엄격히 규제했으나 2008년 민법 및 가족법 개정으로 동성동본불혼은 모두 풀렸다.
다음으로 외사촌과의 혼인관계다. 외손녀와 친손자의 관계는 이성(異姓)으로 봤으니 더구나 의아해할 일이 아니다.
자매가 한집안에 며느리 손자며느리사이가 되는 것을 겹사돈간이라 하며 최근까지도 있는 일이다. 이를두고 딸을 결혼시키면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 했다. 결혼을 하면 남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또 가계도인 가첩 가승은 부계혈통(父系血統)의 기록으로 대외적인 족보(族譜)와는 다르다. 하나의 호적부와 같은 성격으로 결혼을 비롯해 대외적인 문서교환에는 아들 딸 관계없이 생년월일 간지(干支)까지 기록해야하기 때문에 집안에 소장하는 가족기록에는 출생순의 나열이 당연하다. 그리고 외손자의 수록은 뛰어난 특정인물에 한하지만 족보에도 등재해 왔다. 특히 왕실의 내외 친족의 관리를 맡은 종부시에서 제작 했다면 당연한 순차와 입록(入綠)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적서(嫡庶)의 구분이다. 우리나라는 원래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였다. 이에따라 조선조 초기까지만 해도 적자 서자의 차별없이 현직(顯職)에 들어갈수 있었다. 그러나 1415년(태종15) 서선(徐選)등의 진언에 의해 서자는 과거정반(科擧正斑=文科)을 불허하면서 서얼금고(庶孽禁錮) 제도가 시행됐고 규제가 시작됐다.
현덕왕후(1418~1441)는 안동권씨 권전(權專)의 딸로 1437년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됐으나 4년만에 죽었다. 1450년 문종(文宗)이 왕위에 오르자 아내를 현덕왕후로 추책(追冊) 했으니 생전에 왕후로 있지는 않았으며 단종(端宗)의 생모이다. 이로보면 족도는 1450년전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가 1392년에 개국했으므로 불과 50년 사이이며 혼인관계와 적․서의 명확한 기록은 관리상 필요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