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8일 영면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87세)에 대해선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의 철학 등 많은 얘기들이 전 세계 미디어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필자는 이미 알려진 얘기 말고 직접 만나 본 잘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취재 뒷얘기들을 에피소드 삼아 전하려 한다.
필자가 대처총리를 처음 본 것은 1981-1985년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으로 백악관과 의회를 출입하며 취재활동을 할 때다. 아마도 이 5년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가장 호흡이 잘 맞았고 친분이 두터웠던 외국 지도자는 단연 대처 총리였을 것이다.
1983년 회담을 마친 미‧영 두 정상은 백악관 로즈 가든에 함께 나와 기다리고 있던 2백여 명이 넘는 보도진들 앞에 나란히 섰다. 기자는 항상 현장을 뛰어야 한다고 믿는 필자 역시 보도진 중에 끼어 있었다. 그런데 기자들 앞에 나란히 선 두 지도자의 모습을 보며 필자는 두 유명한 주연 배우들을 보는듯한 인상을 받았다. 사실 레이건은 정치인이 되기 전 할리우드의 미남 배우였고 대처 총리도 레이건 못지않은 미모였다. 레이건은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의 표현대로 “레이건대통령의 얼굴만 보아도 마음이 안정된다”는 유머와 위트, 미소가 넘치는 인물이었고 보수당의 상징 색인 파란 옷을 자주 입는 대처에겐 우아한 매력이 있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대처의 연설이었다. ‘뛰어난 커뮤니케이터’란 말을 듣던 레이건은 회담 내용에 대해 간단히 말하고 설명을 대처에게 넘겼다. 대처는 아무런 메모지도 없이 회담 내용을 조목조목 설명했는데 중요한 대목에서 그 음성과 억양은 좀 더 높게 올라가고 명확하고 필요할 때 똑똑 끊는 말엔 강한 힘과 설득력이 있었다.
대처의 연설에 정말 탄복한 것은 1985년 2월 레이건 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친 후 미 의회를 방문해 연설할 때였다. 상원 본회의장 프레스석은 의원들이 앉은 정면을 향해 2층 발코니처럼 되어 있는데 여기서 회의장이 다 내려다 보였다. 연단의 연사나 발언자의 뒷모습도 다 보였다. 그런데 이 대처의 연설 때 필자는 다시 건질 수 없는 특종을 놓치고 말았다. 영국 총리의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은 1952년 윈스턴 처칠 총리의 의회 연설 이후 처음이었다. 미 의회도 취재했던 필자도 의회로 달려갔다. 상원 프레스 갤러리를 통해 2층 기자석으로 들어 가 앉아 본회의장을 내려다보니 대처 총리의 옆모습과 회의장 전체가 눈에 잘 들어 왔다. 대처총리의 연설 내용은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신념과 지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필자도 열심히 대처의 연설을 메모했다. 보통 외국의 유명한 정치 지도자들이 미 의회에서 연설하게 되면 미리 준비한 연설 원고를 읽는 것이었는데 대처는 준비한 원고도 없이 거의 한 시간동안 연설을 했다.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명연설이었다.
그런데 연단에 서서 한 30분쯤 연설을 이어 나가던 대처총리에게 재미있는 일이 눈에 띄었다. 대처는 한 쪽 발을 신고 있던 하이힐에서 빼더니 맨발(물론 스타킹을 신은 발이다)을 하이힐 위에 올려놓는 것이 아닌가. 한 30분 그대로 서서 연설을 하니까 발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이 모습이 연단에 가려 정면에서 중계하던 TV 카메라엔 잡히지 않았으나 2층 연단 뒷자리에선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기막힌 특종 사진 거리였다. 그런데 보통 의회 청문회 취재 때처럼 카메라를 갖고 오지 않은 것이다. 이런 낭패가 있을 수 없었다. 대처는 한참이나 하이힐을 벗고 한쪽 맨발을 구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발을 동동 굴렀으나 그 기막힌 특종 사진을 눈앞에 놓고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이 장면을 다른 미국 기자들이 놓친 것은 기자들이 프레스 갤러리의 자기 회사 부스에 앉아 TV 중계를 보며 기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필자는 어디를 취재 가나 카메라를 반드시 갖고 다녔다.
필자가 귀국 후 대처총리를 서울에서 다시 만난 것은 1992년 9월 동아일보와 인촌기념회, 고려대학교가 인촌기념 강좌 연사로 대처 전 총리를 초청한 때였다. 그 전 어느 날 김상만 명예회장께서 필자를 부르시더니 대처 초청 행사를 맡아 달라고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다른 곳에서 맡았기 때문에 일정상 불과 2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민 회장께선 필자가 1990년 3월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 산타 바바라 (미국 캘리포니아) 국제 학술회의를 맡아 행사를 잘 치른 일을 보았던 것이다. 그 시간부터 필자는 그야말로 ‘비상’에 들어갔다. 우선 강연장인 롯데호텔 크리스털 볼룸부터 확인 점검했다. 그리고 런던의 대처총리 보좌관들과의 연락이 연일 이어졌다. 서울에서의 숙소와 한국 측 경호문제, 강연장소와 만찬장, 초청손님, 이동차량 등, 눈 코 뜰 사이가 없는 시간이었다. 런던에선 미처 생각지도 않은 문의까지 왔다. 롯데 호텔 강연장 연단의 배경 색깔이 무엇인가? 대처총리가 연단에 올라갈 때 높이는 얼마나 되나? 연단에 오를 때 누가 부축을 해주는가? 등. 당연한 문의였다. 연단 배경 색깔은 의상과의 색깔 조화를 맞추기 위한 것이고 연단 높이와 부축은 하이힐을 신어도 안전한지를 사전에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대처 도착 한 주전 서울로 날아 온 경호담당 런던 경시청 간부와 만찬장의 프로판가스 안전문제, 연회 음식을 데우는 곳과 만찬장과의 거리 측정 등 안전을 위한 그 세밀하고 완벽한 체크는 놀라울 정도였다.
대처 총리의 강연회 날, 사회를 맡은 필자는 대처를 연단 위로 부축해 안내하곤 크리스털 볼룸을 꽉 메운 1천 4백여 명의 청중에게 대처를 소개했다. “제가 워싱턴의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기자회견을 위해 로즈 가든으로 나온 대처 총리를 처음 보았을 때 저는 저렇게 아름다운 분이 배우가 되었다면 크게 성공했을 텐데 하고 느꼈습니다.” 그러자 연단의 대처는 미소를 지으며 필자를 향해 “친절한 인사 말 감사합니다”고 답변했다. 필자는 그 때 “아무리 철의 여인이라도 아름답다는 말은 누구나 좋아하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이날 대처 전 총리는 ‘아시아의 경제적 정치적 미래‘라는 제목으로 “아시아가 번영하기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법의 지배” 라고 강조하고 따라서 “꾸준히 민주주의를 신장시켜야 경제적 번영이 옵니다”고 연설했다.
워싱턴에서 대처총리를 처음 만나 본 순간부터 필자는 여성이 어떻게 저 강철 같은 신념과 의지를 갖게 됐을까 하는 놀라움 뿐 이었다. 그러나 그 해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 신념은 대처가 1979년 선거에서 승리해 총리가 되었을 때 한 말처럼 어렸을 때부터 이미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그의 가족들이 열심히 믿었던 자립 근면 노력 등 감리교 정신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랜덤의 한 식료품상에서 감리교회의 장로, 시의회 의원 그리고 그랜덤의 시장까지 된 알프레드는 딸에게 항상 “따돌림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집단에 맹목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네가 할 일은 네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가치관을 심어 주었다.
국가에 대한 존경, 개인주의, 노동의 신성함 등이 본질인 ‘대처리즘’에 대해 대처는 직접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정권을 맡았을 때 영국은 쇠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런 영국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특별한 정책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먼저 용기 있는 기업가 정신을 본보기로 삼았으며 흐트러졌던 법과 질서를 바로 잡았습니다. 부당하게 운영되던 노동조합 문제도 해결했습니다…” (고승제 저 ‘마거릿 대처’에서). 대처총리에 대해선 재임중 그의 과감한 복지축소, 공기업 민영화, 교육개혁 정책 등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대처가 11년간 연임한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50명의 저명한 영국 역사학자들은 대처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가장 위대한 총리로 선정했다. 이렇게 ‘영국 병’을 회생시킨 ‘철의 여인’은 지난 4월 17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각국 지도자들이 참석한 성대한 장례식을 갖고 왕립 첼시 안식원의 부군 곁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