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언론포럼이 창립기념 첫 해외 세미나 장소로 대마도를 택한 것은 나름대로 의도한 것이 있었다. 일본이 집요하게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해 온데다 아베정권의 노골적인 우경화 행보가 가속되고 있는 상황인 만큼 회원들이 “대마도도 ‘우리 땅’임을 직접 현장에서 실감해 보자”는 취지였다. 많은 회원이 그런 의견을 말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5월 15일 오전 10시 40분부터 16일 오후 3시 반까지 28시간 50분 동안 대마도에 머물렀다.
우리 일행이 히타카쓰(比田勝)항에 도착 후 곧 바로 찾아 본 곳은 섬 북단에 위치한 ‘한국 전망대’-아주 맑은 날에는 그곳에서 부산이 보인다고 했다. 1607년에 시작된 조선통신사들의 일본내왕은 바로 아래 히타카쓰 항을 기착지로해서 60여 번 이어졌다.(현장 안내판).1703년 2월에는 통신사일행 108명이 입항 직전에 폭풍우로 조난을 당하는 참사도 빚어졌다는데 현장에는 2미터 정도 높이로 세워진 위령비만이 옛일을 일깨워 주었다.
그날 오후 오보시다케(鳥帽岳), 와다쓰미(和多都美) 신사 등을 관광한 후 다음 날 오전 남쪽으로 이동해서 이즈하라(嚴原)에 도착한 일행은 수선사(修善寺)-고려문-덕혜옹주 결혼 봉축(奉祝)기념비- 우국지사 최익현선생 순국현장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수선사 경내에는 일제에 의해 3년형을 선고받고 대마도에 유배돼 1년 3개월만인 1907년 1월에 순국한 최익현 선생을 기리는 순국비(殉國碑)가 서 있어 그나마 일본의 한 가닥 양식을 말해 주는듯했다.
대마도 도주(島主)의 후손과 결혼한 고종의 따님 덕혜옹주의 대마도방문(1931년 11월)을 기념해서 주민들이 세웠다는 기념비 앞 상석에는 조화(造花)장미 몇 송이의 작은 화분이 놓여 있었다. 그 앞에서 여행사 가이드는, 일제가 강제한 정략결혼으로 참담한 삶을 살다간 덕혜옹주의 일생을 진지한 어투로 설명했다.
우리 일행은 마지막으로 최익현 선생이 유배기간 동안 기거하다가 일본음식을 줄곧 거부한 끝에 아사(餓死)지경에서 운명했다는 현장을 찾았다. 그러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현장에는 비극적 사실(史實)을 알리는 어떤 표지(標識)도 눈에 띠지 않았다.
‘역사탐방’을 끝내고 다시 히타카쓰항으로 달리는 버스 속에서 우리는 ‘이색 행사’를 가졌다. 말하자면 ‘버스 속 세미나’였다. 최귀조회장의 사회로 자유 발언 토론형식으로 진행된 ‘버스 세미나’에서 회원들은 한일관계는 물론 오늘의 남북문제 등에 대해서도 기탄없는 의견을 토로했다.
조규석(전 세계일보 논설실장)은 1970년대 중후반 4년 동안 언론사 도쿄 특파원을 역임한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일본 우경화의 흐름에 대해 설명했다. 여영무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박실 전 기자협회 회장은 남북문제에 대한 소신을 피력했다. 두 회원은 각각 “김정은 정권의 붕괴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치밀한 대북 심리전을 펼쳐야한다”,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남남 갈등의 해소가 가장 긴요하다”고 했다.
회원들은 대마도를 둘러보는 동안 한일관계사에 드리운 명암을 확인했다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상당수 회원은 "여러 사실(史實)로 미루어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행사 가이드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대마도에는 우리 민족의 한(恨)과 슬픔이 곳곳에 배어있다.”- 대마도를 찾는 한국인의 정서로서 지금도 이어지는 그 한과 슬픔의 근원은 어디일까. 역사의 가혹함이다.
대마도도 독도처럼 우리 땅임을 증거 하는 사료(史料)는 적지 않다.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백두산은 머리고, 대관령은 척추며, 영남은 대마를, 호남은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라는 글귀가 있고 19세기에 작성된 경상도 지도에서도 대마도는 조선 땅이다. 정한론(征韓論)의 시조 격인 일본 지리학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1785년에 만든 ‘삼국접양지도’에도 대마도가 조선 땅으로 표기돼 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정부 수립이후 6·25전쟁 전까지 기자 회견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일본 정부에 강력하게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6·25 발발로 한국은 일본을 통해 유엔군과 물자를 지원받게 됨으로써 대마도 반환을 거론할 수 없었다.
최근에 팩션(Faction)형식의 소설 ‘천년의 恨(한) 대마도’를 펴낸 작가 이원호는 “대마도에는 한국의 성황당처럼 조상신이나 토지신(土地神)을 모시는 신사가 29개인데 모두 한반도를 향해 세워져 있다”면서 ‘이는 대마도가 우리 땅이란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료를 조사하다가) 1923년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역사학자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고문 주관 하에 대마도를 방문해 한국 관련 문서 6만6469장, 고기록 3576권, 고지도 34장 등을 불태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히고 “일본이 그토록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없앤 것은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는 증거를 없애기 위한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까?”라고 반문한다.(4월22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주마간산’(走馬看山)격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대마도에 대한 포럼회원들의 감회는 대체로 일치하지 않았나 싶다. ‘대마도는 우리 땅인데 어찌해서...’라는 그런 ‘정한’(情恨)의 심경으로서 말이다. 그렇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어야 했다. 사료의 뒷바침으로서 뿐만이 아니다. 부산으로부터 지척(49.5 킬로)인 그 거리감에서부터 지세(地勢)로 느껴지는 대마도의 인상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러했다.
귀국하는 날, 현해탄에는 격랑이 일었다. 오늘의 한일 관계처럼!...아니 두 나라의 역사가 간헐적으로 그러했던 것처럼!... 파고 4미터. 상당수 승객들은 구토하며 고통스러워했다. 부산항에는 예정시간보다 40분 늦게 입항했다. 선린(善隣)으로서의 한·일 우호가 완전 복원될 날도 그렇게 지체될 것인가. 그런 상념과 함께 여객선 선실에서 발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