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정신에서 “나는 신문이 신문이었던 시대의 기자였다”고, 글의 서두에 매무새를 가다듬지만, 사실은 내가 현역이었던 40~50년 전의 신문은 기계적인 제작방식에선 동네 대장간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편집기자가 기사를 가시적(可視的)인 판(版)으로 짜던 공무국에선 새 활자를 찍어내느라 주자기(鑄字機)가 철거덕 거리고 납이 유독가스를 내뿜으며 도가니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또 동판(銅版)을 부식시켜 사진판이나 컷(헤드라인)을 만들던 제판실의 코를 찌르는 화공약품 냄새는 편집기자만이 후각으로 기억하는 전시대의 작업환경이다.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지” 할때의 ‘정말’은 팩트(Fact)다.
팩트는 진실(Reality)이다. 사실이 곧 진실이 아닐 수 있지만 신문에선 사실이 진실이어야 마땅하다. 그 무렵 신문이 갖고 있던 3가지 기능은 신속(속보성), 정확, 공정(公正)이다. 정확성은 팩트를 뒷받침 한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신문이 첫째 기능으로 내세우던 속보성은 이미 무기로서 해제된지 오래다. 실시간으로 시청각 뉴스를 눈앞에 펼치는 전파 매체의 기능앞에 신문의 속보성은 퇴물이 된 것이다.
천지개벽같은 정보환경의 변화를 단순하게 ‘대매체시대’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종이문명의 쇠망기(衰亡期)에, 형태로서의 문명의 단경기(端境期)에, 종이라는 그릇에 정보를 담아서 파는 신문의 미래는 있는가? 그 존립은 가능한가? 정보의 정확성과 공정성, 두 가지 뼈대만 남아 있어 힘이 부치겠지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메이저 신문 하나를 들어 그 가능성을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이름은 덮어두는게 좋겠다.
제목의 견인력과 정보의 다양성, 편집의 시각화, 기사의 공정성, 주장의 명징(明徵)성과 일관성, 한편으로 전파쪽에 촉수를 뻗어가는 그 신문의 생존방식에 마음이 끌리지만 반드시 낙관적인것만은 아닐것 이다. 다음에 드는 이야기는 그 어려움 때문에 신문이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의 단답(單答)일 수는 없지만 상징적으로 팩트가 얼마나 중요하고 충격적인가를 보여준다. 팩트가 진실일 경우에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얼마전에 나는 저녁 8시부터 새로 산 책 한권을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일본신문 ‘마이니치(每日)’의 사회부 이야기로 그 신문의 사회부장이었던 저자가 쓴 ‘매일신문 사회부(社會部)’라는 실록(實錄)이다. 밤 11시가 넘어 나는 읽던 책을 덮으며 무릎을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용은 이렇다.
‘철로를 둘러싼 검은 안개’로 불리는 ‘마쓰가와(松川) 사건’의 대법원(일본의 최고재(最高載)) 판결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1959년 8월 10일의 판결일까지 대법원 심리 3년여. 판결의 대상이었던 피고는 17명. 고법에서의 판결은 사형 4명, 무기 2명, 징역 15년 2명, 징역 13년 1명, 징역 10년 3명, 징역 7년 4명, 징역 3년6개월 1명.
이 사건은 미군의 정보부(CIC)가 깊이 간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소문이 나돌던 대형사건이다. 피고 전원이 좌익계노조원으로 지목되던 터라 당시의 일본 권력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설(設)도 있었다. 그러나 철로의 침목에 박혀있던 대못을 뽑는 바람에 기관차가 엎어져서 기관사 3명이 죽었으므로 피고 17명의 명운은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와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절체절명같은 이 사건을 ‘마이니치’ 신문의 사회부 2년차, 후쿠시마(福島)지국에 배속되어 있던 ‘구라시마’ 기자가 뒤집는다. 그 전말을 다 쓰자면 너무 길어지므로 줄이자면, 피고 중의 한 사람이 열차전복을 모의 했다는 그 장소, 그 시간에 사실을 딴 곳에서 회사의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는 메모지 한 장을 찾아내는 바람에 일본 패전후 최대의 의옥(疑獄) 사건은 어이없이 무너져 내린다.
고법에 환송된 피고 17명은 전원 무죄로 방면된다.
이것이 무엇인가? 남의 나라 재판 이야기 이기는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신문의 깃발이요, 핵이요, 진수라고 할 ‘팩트’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실(판결)을 넘어 진실(무죄)로 접근하는 기자의 깊이가 단순명쾌하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눈물과 땀과 투철한 사명감이 없고서는 어떻게 통념상 철벽과 같은 대형사건의 고법판결을 깡그리 뒤집을 수가 있겠는가.
돌개바람처럼 쓸고가는 감탄에 나는 가슴속이 멍멍한 느낌이었다.
구름위의 사연 같은 이야기에서 일전직하 지상으로 내려와 내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언론을 싸잡아서 나무랄 수는 없지만 팩트를 훼손하는 기자의 실상이 어떠한지 한눈에 드러난다.
나는 지난 4월 초순에 출판사 ‘나남’에서 ‘편집기자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自傳) 한권을 출간했다. 책을 내기 위해 ‘나남’ 편집부에 원고를 넘겼더니 서른살이 채 안된 젊은 여직원이 교정지와 함께 편지를 띄우기를
“선생님 글은 잘 읽었습니다. 투철한 직업의식과, 편집이란 직종에 대한 애정과, 소신을 지키기 위한 강단은 신문기자가 아닌 나같은 보통 젊은이도 읽어 볼 만합니다. 유머실은 문장도 매력적이고요…”
나는 그날 종일 기분이 좋았다. ‘옳거니’ 자네가 바로 보았군. 고맙네. 그러나 한 달 쯤 지나자 나는 어이가 없어 멍멍한 기분이었다. 책이 출간되고 난 뒤 몇 군데 신문과 기관지(언론단체), 뉴스위크(한국판)에 ‘책 소개’가 실렸다. 현역기자가 아닌 편집부장 출신의 후배 맹태균씨가 ‘대한언론인’ 회보에 쓴 소개는 핵심을 찌르는 단평이라서 내가 나무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서평이라면 제가 젠척하는 메이저 신문의 객원기자가 장황한 곁가지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팩트를 마구 훼손해 놓은 대목에 이르러서는 노여움 보다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팩트를 제 마음대로 훼손해 놓은 실상을 보자.
책 속의 ‘편집사천왕’에 등장하는 조선일보 편집부장 출신의 조영서 대목이다.
1950년대 한문 투성이의 제목 시절에 국제신문 사회면 편집기자였던 조영서는 살인강도의 체포기사에 통단컷 ‘잡았다 김성경’ 이라는 표제로 신문제목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고 썼더니 그 서평기자는 ‘잡혔다 김성경’으로 바꾸어 놓고, 처음으로 인류가 달에 착륙했을때 조선일보의 제목 ‘달이 숨쉬기 시작했다’는 명구(名句)는 당시의 편집국장 선우휘의 제목이었다고 분명히 써 놓았는데도 그걸 조영서의 제목이라고 한 것이다. 그뿐인가 동아일보편집국장․주필을 지낸 천관우를 국사적(國士的)인 풍모라고 했더니 이 기자는 국토적(國土的)이라고 해 놓았으니 선비 사(士)자와 흙 토(土)자를 구별 못하는 청맹과니 같은 이런 기자가 어떻게 메이저 신문의 서평 전담 객원기자일 수 있나? 이것이 한국신문의 실상이라고 한다면 단정이 심하지만 그 일단은 드러나지 않았는가. 또 내가 1962년 민국일보 편집부에 있을때 동해에 표류해온 북한의 기뢰사진에 붙인 제목(컷)은 ‘위험한 밀항자’인데 그걸 ‘위험한 밀입국자’로 바꿔 놓지를 않나, 당시 5․16 후 혁명재판에서 줄줄이 사형선고가 떨어지던 법정 스케치 사진에 내가 단 컷은 ‘7월에 쏟아지는 단죄의 서릿발’이라는 제목으로 당시의 법조출입 기자들이 탄성을 질렀다는데 그 서평기자는 이 제목을 신파조라고 했으니 실성하지 않고서야 이런 망발이 가능할까. 또 신문제목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는 대목을 한국신문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고 했으니 착각으로 시종한 그 객원 기자의 종횡기는 기록감이다. 또 나의 한국일보 시절 내 실수에 대해 장기영 사장이 껄껄 웃었다는 대목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장기영 사장은 기자의 실수에 대해 웃는 사람이 아니다. 추상같은 사장을 무골호인으로 바꾸어 놓았으니 어떻게 할까. 그러는 한편 나를 두고 ‘한 시대를 앞서 갔느니, 아무도 할 수 없는 영웅적인 행위’라고 했으니 그게 괜한 소리로밖에 더 들리겠나?
현재 중앙지의 현역 편집국장으로 있는 후배로부터들은 이야기로는 그 서평기자가 성경속의 ‘욥’과 ‘요나’를 착각해서 터무니 없는 망발을 칼럼에다 늘어놓았다고 했다. 단순하게 ‘욥은’ 자식을 하느님에게 제물로 바친 사람이고, ‘요나’는 고래의 뱃속에 갇혔던 구약 성경상의 인물이다.
무식하고 시각장애가 있는데다 치매끼가 있는 이런 기자가 팩트를 제마음대로 훼손하는 오늘은 어떤 시대인가? 20억개의 홈페이지를 엮어내는 구글(google)의 기술이 ‘파괴자처럼 전능한 신’처럼 군림하는 대변혁의 시대다. 이런 시대를 신문이 살아 남자면 ‘구글’이 죽었다 깨어나도 갖지 못하는, 진실에 접근하는 기자의 노력이 없고서야 가능하겠는가. 팩트는 신문의 신이다. 팩트를 훼손하는 기자는, 신문은 마땅히 도태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스스로 신뢰의 끈을 끊고 지반(地盤)을 강하(降下)시켜 독자를 다른 동네로 밀어내는 행위는 자살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