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또래들이 수선을 피우며 앞뒤 없이 떠들어대면 할머니께서는 ‘귀가 아프다’시며 야단을 치셨다. 그때는 귀가 왜 어떻게 아픈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역시 나이를 먹어보니까 요즘은 귀가 아픈 것을 느낀다. 할머니보다 더 자주, 심하게 아플 때가 많다.
나이가 들면 귀가 예민해지나 보다. 눈은 거꾸로 침침해지는데 말이다. 우선은 우리 주변의 소음 때문에 귀가 아프다. 질주하는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굉음은 그러려니 한다 해도 도로변 가게의 무절제한 확성기 이용, 지하슈퍼마켓의 지칠 줄 모르는 호객 고함, 골목을 가득 메운 에어컨 실외기의 바람 내품는 소리까지 귀는 고사하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요즘 한 가지 더 극성을 떠는 소음이 있다. 지방선거 유세차량의 고막을 찢는 듯 하는 영양가 없는 말들이 멈췄나 했더니 금방 머리에 붉은 띠를 맨 사람들의 ‘분쇄’ ‘박살’ ‘투쟁’ 등 소름끼치는 구호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귀를 때린다.
혹사당하는 귀에게 미안해 잠시 귀 대신 목이라도 축이려 들르면 우리의 애주가들은 어찌 그리 목소리가 높은지 장마당이나 진배없다. 귀가 길의 버스와 지하철 안의 휴대전화 통화소음은 남녀노소 따로 없다.
그러나 이 정도의 귀 아픔은 우리네의 말뜻도 알맹이도 없는 언어습관에 견주면 약과다. 오다가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것은 우리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국어도 아니고 도대체 어느 나라 어느 종족의 말본새인지 알 수가 없어 빈 꽹과리 소리보다 더 귀가 아프다.
은행창구 직원의 “손님, 죄송한데요. 수수료가 나오세요”라는 안내에 수수료님이 어느 쪽에서 나오시는지 두리번거려야 한다. 백화점 판매원의 “이 구두는 볼이 좁으세요. 손님은 볼이 넓으신 이 구두를 신으세요”라는 말에 내 못생긴 발이 구두님에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모른다. 또 관광안내원의 “저기 보이시는 산이 한라산이세요”라는 안내에 한라산이 얼마나 위대해 보였는지 모른다.
내 귀만 예민하고 아픈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네 젊은이들은 일터에서 모든 사물에 극존칭을 사용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라고 교육을 받는다니 참으로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일본과 틀려서 운전석이 왼쪽입니다.” “이 배추는 저것과 품종이 틀립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의 자동차와 일본의 차는 어느 쪽이 틀려서 옳지 않다는 것인지, 이 배추와 저 배추는 어느 쪽이 잘못된 것인지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달리 운전석이 왼쪽입니다.” “이 배추와 저것은 품종이 다릅니다”라고 해야 말이 통하는데 말이다.
말은 세태를 반영한다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틀리다’와 ‘다르다’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요즘 정치인들의 행태에서 비롯된 것인 듯하다. 자기의 견해와 다르면 무조건 상대가 틀린 것으로 몰아붙이는 정치인들의 억지가 시정인의 정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자기와 다른 견해와 주장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항상 자기만 옳다는 독단이 이 같은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 있다. “이 건물은 200년 전에 지어졌다.” “500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은 국보급이다.”와 같은 옛 말이다. ‘200년 전에 지은 건물’이 왜 ‘200년 전에 지어진 건물’로, ‘500년 전에 쓴 책’이 ‘500년 전에 쓰여진 책’으로 말 바꿈 했을까. 문법은커녕 어법에도 맞지 않는 표현인데 방송사의 기자와 현장 리포터들이 아무런 의식 없이 사용함으로써 시청자의 언어습관을 망가뜨리고 있는데 아무도 경정하려 들지 않는다. 아마 영어공부에 심취한 나머지 영어식 표현에 익숙해서 그렇다 할는지 모르지만 이는 영문법에도 전혀 맞지 않는 콩글리시다.
아무튼 한심하다. 그래서 귀가 아프다. 우리말은 잃어버리고 외국말은 잘 못 쓰는 무관심과 배짱과 뚝심과 오기가 한심하다. 해남의 땅끝마을로 회향한 선배를 1년 만에 만났는데 세었던 머리가 검어지고 얼굴의 주름이 활짝 펴있어 깜짝 놀라 연유를 물었더니 “귀가 깨끗해져서”라는 즉답이었다. 들어서는 안 될 말, 나쁜 말, 말이 되지 않는 말을 듣지 않는 것만으로 신수가 펴진다는 말은 지극히 합당한 말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