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과 관악산을 축으로 하여 건립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근정전 어좌 앞 월대 위에서 내려다보니 바로 앞 근정문을 통하여 홍례문과 함께 어김없는 일직선상으로 곧음이 확인됐다. 일제 강점기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와 남산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축으로 삼기 위해 계획적으로 광화문을 틀어 놓은 정문의 각도(북쪽 12.2m 동쪽 13.5m)가 제자리를 잡았음이 한눈으로 느껴진다.
광화문은 조선왕조가 개국한지 4년째인 1395년 법궁(法宮)인 경복궁과 함께 지어졌으며 당초 정 남향의 오문(午門)으로. 태조가 정도전에 명하여 궁궐 전각의 아름을 지을 때 정문(正門)으로 명명 하였다. 정도전은 고전을 인용하여 명령과 정교(政敎)가 반드시 정문을 통하여 나오기 때문에 자세히 살핀 뒤에 나오므로 참소하는 말이 행해지지 못하고 거짓으로 속이는 것도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며 이 문을 닫아서는 괴이한 말을 하는 부정한 백성을 거절하고 이 문을 열어서는 사방의 어진 이를 오게 할 것이니 이것이 모두 정(正)의 큰 뜻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의 위웜과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광화문은 세종8년(1426) 12월 6일 “빛이 나라 밖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 는 드높은 기상이 서려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광천화일(光天化日)의 준말로 임금의 크나큰 덕이 마치 햇살이 전국 방방곡곡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골고루 미치게 한다는 뜻의 또 다른 해설도 있다.
궁궐과 함께 지어진 최초의 광화문은 근정전 사정전과 함께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청기와를 얹은 3층 누각으로, 누각 위에는 종과 북을 달아 시간을 알림과 동시에 새로 생긴 법을 공포하거나 과거시험을 치르는 등 중엄(中嚴)을 경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세종 13년(1431) 광화문이 기울어져 고쳐 지은 후 160년이 지난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소실되기 까지 법궁의 정문으로서 그 위상을 드높였다. 그 뒤 그 자리에는 정조 때 임시로 새 문을 세우고 구광화문(舊光化門)이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다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광화문은 273년이 지난 고종 2년(1865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 중건과 함께 다시 세워졌으며 현판은 당시 훈련대장으로 영건도감의 제조를 겸직하고 있던 무신(武臣)임태영(任泰瑛)의 글씨이다. 광화문 현판 글씨는 한 때 도화서원인 정학교(丁學敎)가 쓴 것으로 잘못 전하여지기도 하였다.
고종 때 중건된 광화문은 석축기단에 3개의 아치형문(虹渤門) 을 두었으며 좌우에는 신하가, 가운데 약간 큰 문은 국왕이 다니는 문이다. 천장에는 주작(朱雀)의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문 앞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가 자리 잡고 있다. 문 위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지붕을 얹었으며 2층에는 목조문루를 세웠고 1층의 기둥사이는 개방하였고 2층에는 판문을 달아 열고 닫게 하였다. 두공(杜栱)은 다포식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삼출목(內三出目),외부는 제공(諸栱)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雲工)을 만들었으며 첨차(墅遮)양 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波蓮草刻)을 하였다. 대들보는 고주(高柱)에서 합보형식을 하고 보와 위층 마루 사이에 공간을 두었다. 아래위층 처마는 모두 겹처마이고 지붕의 각 마루에는 취두(鷲頭) 용두(龍頭)잡상(雜像)을 두었다. 추녀 끝에는 토수(吐首:용두·鬼頭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이 광화문은조선총독부와 남산의 조선신궁을 축으로 삼아경복궁의 가림막 역할까지 하도록 조선총독부 청사를짓고 보니 광화문이 삐딱하게 청사 앞을 가리게 되자 이를 철거하여 훼철(毁撤)시켰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문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우리나라 언론계의 대 논객 소오 설의식(小梧 薛義植)선생의 철거 규탄으로 1927년 4월에 철거된 지 5개월 뒤인 9월 15일 건춘문(建春門)북방으로 이전 건립된 후 폐가처럼 보냈다. 그러나 그나마 6·25를 맞아 폭격으로 소실되었다가 1968년 박정희 정권 때 현 위치에 석축 일부를 수리하고 문루를 목재가 아닌 콘크리트 구조로, 원래의 자리 축 보다 5도가량 틀어지게 옮겨지었으며 현판 글씨는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한글로 썼다. 하지만 새로 복원한 광화문은 콘크리트 건물이기 때문에 처마의 선이 곡선을 이루지 못하고 직선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목조건물의 운치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자 위치도 조선왕조 건국 초기 때의 위치가 아닌 틀어진 위치라는 등의 문제가 제기되어 마침내 원래의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이번 복원에 앞서 발굴 조사하여 새로 발견한 광화문 안 뜰 동쪽의 협생문(協生門)과서쪽의 용성문(用成門)을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였으며 아울러 문 바로 뒤 양쪽에 수지장청(守直將廳)까지 복원, 1865년 고종 때 중건된 후 145년 만에 완전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태종 12년 10월 7일 유사(攸司)에 명하여 종을 주조, 궁궐 문에 달았는데 그 종에는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지낸 변계량(卞季良)이 종정(鐘鼎)에 다음과 같은 명(銘)을 새겨 광화문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