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기자였던 나는 1965년 12월 10일 아침 8시 동아일보사가 모집한 스키 강습 회원 40여 명과 함께 평창에 취재차 동행한 길이었다. 동아일보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키가 무엇인지도 모를 그때 동계 스포츠를 보급하기 위해 스키 강습회를 4년 전부터 개최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대한뉴스를 통해 스키를 알고는 있었지만 입사 후 처음으로 스키 강습 현장을 취재 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호기심과 함께 잔잔한 흥분을 느꼈다.
평창 가는 길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국도와 지방도로를 번갈아가며 적어도 7시간은 달렸을 것으로 기억된다. 강원도 산길, 정말로 구절양장(九折羊腸) 꼬부랑 좁은 길, 그나마 천인(千仞) 절벽을 기어 가다시피 하는 버스 아래를 차창 밖으로 내다보면서 현기증이 의식을 덮는다. 움푹 패인 좁은 흙길을 먼지를 날리며 버스가 계속 덜커덩 거리며 튈 때면 모두들 합창이라도 하듯 큰소리로 신음했다.
그때 회원들이 강습 받던 스키장은 지금의 용평리조트가 아닌 ‘오수도리’ 산장과 그 앞의 나지막한 야산슬로프. 이 산장은 동경 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채수흥이란 분이 운영을 하고 있었다. 산장의 구조는 2층 통나무집으로 1층 중앙은 천장까지 훤하게 홀을 만들어 큰 난로를 두고 옆으로 1, 2층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지금의 천편일률적으로 깨끗하게 손질한 수입나무로 지은게 아니라 거친 잡목을 예쁘게 맞춰 지은 집으로 운치가 있었다. 이 산장 주변에는 어떤 집도 없었다. 허허벌판 눈밭 속의 이른바 독가촌(獨家村)이었다.
채수흥씨는 자신의 대학 선배가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선생이라고 자랑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우분도 일본 거류민단의 체육계 유력인사 채수인씨였다.
그때 동행한 인사 중에는 언론인 홍종인씨와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의 아들들이었다. 넷 인가 다섯 형제가 아니었나 기억되는데 한나라당 정몽준 의원과 고 정몽헌 회장도 있었다. 지금 기억으로 초등학생인 걸로 생각된다. 나는 그때 현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지금 보니 당시 현대는 날개를 달고 비상하던 시기였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소양강댐 공사를 했다고 자랑하였으나 나는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동행한 홍종인씨는 평창으로 가던 중간 홍천에서 막국수로 점심을 먹을 때 먹는 법을 교육 하기도 하고 스키에 대한 강의는 돌아올 때까지 했다.
오수도리 산장 앞 슬로프는 길어봤자 50여 미터에 불과하여 대회 경기는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연습장에 불과했다. 다소 가파른 슬로프도 있었지만 강습 받던 회원들은 완만한 슬로프 아니면 평지에서 강습을 받거나 좀 경험 있는 분들도 그곳에서 즐겼다. 강사는 연세대 교수 한 분과 전문산악인 한 분 등 두 분이 맡았다. 낮에는 스키 강습, 밤에는 포커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스키 강습회의 스키는 오수도리 산장에서 준비해 둔 장비를 대부분 이용했는데 되돌아보면 웃음부터 나온다.
등산화의 구두창 앞 뒤 중간을 움푹 들어가게 만들어 스키에 구두를 고정시키는 ‘빈딩’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스키화였다. 지금의 스키화는 그때 없었다. 스키도 요즘의 멋스러운 스키가 아니라 투박한 원목 수준이었고 빈딩도 요즘은 찾아 볼 수도 없는 야생동물을 잡을 때 쓰는 올가미 형태의 철사줄로 보면 틀림없다. 스키 강습회원들은 아침 식사 후부터 스키를 배우고 타며 오후 늦게까지 배워 대부분 4박 5일 일정이 끝날 때 쯤 넘어지지 않고 탈 정도의 수준은 됐다.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가 본 그때의 평창은 오지(奧地)중의 오지였고 묵었던 산장도 밤에 석유 램프로 어둠을 밝혀야 했을 정도의 두메산골이었다. 그렇던 평창이 2018년 동계 올림픽을 열게 됐다. 상전벽해(桑田碧海)를 느낀다.
오늘의 평창은 계절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찾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준다. 겨울철 아름다운 슬로프를 비롯해 특히 눈 내리는 평창의 밤은 너무나 환상적이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걷는다든가 창 밖에 내리는 눈송이를 볼 때면 지상 낙원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하는 착각 마저 들게 한다.
우리 소득이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스키 인구도 늘고 있는데 어느 집 할 것 없이 겨울이 되면 가족들의 성화에 스키장을 찾게 되는 것이 오늘의 세태다.
곧 평창 올림픽을 위한 준비에 나설 것이다. 90년대 초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열렸던 동계 올림픽을 참관한 적이 있다. 그때 느낀 것은 대회 후 그 지방에서 사용하기 어려운 용도의 건물은 이동식으로 지어 대회 이후 그 건물이 필요한 다른 곳으로 이동해 활용하도록 배려한 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숙소 등은 대회 후 그 지방에서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겨 사용할 수 있도록 이동식으로 지어 배치했다. 우리는 무엇을 한다 하면 최고의 건물을 짓겠다는 생각부터 한다. 그리고 대회 이후 관리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문제들은 계획 과정에서 잘 여과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동계 스포츠의 선진국이 됐다. 쇼트트랙에서 선두를 달리더니 스피드 그리고 피겨 스케이팅에서도 세계 최강국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자랑할게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