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점심시간후, 신문제작에 쓴 자료들을 뒤치다꺼리 하면서 언제나의 말투로 “그런사람들이 무슨 정치인이라고....” 하면서 핀잔하면 “김형 일본엔 ‘정치인’이란 말은 없어. ‘정치가’라고 해요” 라며 말을 바꿔 끼우란다. 맞은편 빈 자리에 앉아 일본 정계동향의 요점을 집어서 한바탕 비난한 C씨, 그는 조선총련(朝鮮總連)의 간부를 지내다가 한국민단(民團)으로 전향해온 사람이었다.
우리는 정치에 능하고 잘 다스리는 사람을 정치가, 정치에 관계하는 사람은 정치인이라고 편의상 나눠서 얘기하지만, 일본사람들은 정치를 직업으로하는 전문가이면 누구나 정치가라고 부른다.
그때, C씨와 주고 받은 일본 정국 정세내용은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 하지만, 아직도 기억 나는 것은 자민당(自民堂)이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잃게되자 나카소네(中曾根康弘) 총리는 정권유지를 계속하기 위해 무소속의원들에게 자민당의 ‘추가공인’을 남발해준 경위였다. C씨는 일본정국 뿐만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던 조선총련의 조직에 대해서도 박식했으며, 가끔 심심파적으로 신문사 사무실에 들르곤 했다. 그 후, 나의 신문사 퇴직으로 그와는 거리가 멀어졌고 가끔 안부전화가 있었을 정도였다.
2002년 가을, 추석을 한주일쯤 앞두고 성묘를 위한 귀국 스케줄을 짜고 있는데 C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때는 이미 고이즈미(小泉純一郞)일본총리가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하게될 것이라는 워싱턴발표가 있은 후 였다. “올것이 왔습니다. 조선총련 사회가 깨질때가 왔습니다. 그들은 이제 일본에서 얼굴을 들고 살지 못 할 것입니다.” 그는 흥분해 있었다. 서로는 오랜 격조를 사과하면서 닥쳐올 난국에 대해 기탄없는 회포를 풀고자 만났다.
그는 북한정세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다. 고이즈미 일본총리가 김정일위원장을 만나는 것은 국교정상화를 미끼로 일본인 납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납치문제에 대해 ‘북한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해온 조선총련과 이에 동조한 일본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이 숨을 죽이고 회담의 귀추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별난 사람’ ‘정책통’ 등으로 인기가 높았던 고이즈미 총리는 9월 17일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북․일(北․日=日․朝) 평양선언’에 서명하고, 국교정상화 교섭을 10월에 재개한다는데 합의했다. 그때 북한은 “특수기관의 일부가 맹동주의․영웅주의에 빠져 일본인을 납치했다”고 인정하고 사죄했다. 아울러 납치 피해자 5명의 일본귀국을 승인했다. 그리고 북한은 식량 25만톤과 1천만불 상당의 의약품지원을 받기로 했다.
C씨의 예측은 적중했다. 북한의 앞잡이기관인 조선총련사회를 맹렬한 쓰나미(津波)가 휩쓸고 지나간듯 조직이 산산조각이 났다. “신세를 지고 있는 이웃, 일본사람을 잡아 가다니, 이젠 얼굴을 들고 살수가 없다” 면서 많은 조선총련 사람들이 한국적으로 또는 일본적으로 국적을 옮겼다. 1990년 말까지만해도 10만여명이던 조선적이 2010년에는 3만~4만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당국은 집계하고 있다.
일본의 대 북한 창구였던 일본사회민주당도 ‘때늦은 대응’에 쫓겨야 했다. 그해 봄부터 당내에 납치자문제 대응에 갈등이 생겨 ‘납치를 비난하는 성명’을 내기는 했으나 결국은 ‘조선노동당과의 관계동결’을 발표하는 최악의 결말을 맞은 것이다. 국회의원수도 양원을 합쳐 수명에 불과한 영세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