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철 감독의 한국영화 ‘써니’는 묵은지 비빔밥 같은 영화다. 겉절이의 생동감은 없지만 숙성된 묵은 김치로 잘 비빈 비빔밥 같은 영화다. 올해 상반기 극장가 관객동원 톱을 차지한 ‘써니’는 여러 가지 나물에 한국인의 주식인 밥을 고추장이란 매운 소스에 비빈 비빔밥처럼 달콤한 추억과 고달픈 현실을 오고가면서 코미디와 멜로로 잘 조합해 40~50대 여자들의 감성에 화학적 큰 반응을 일으켰다.
‘써니’는 제명도 외국영화처럼 아리송하고, 슈퍼스타도 출연하지 않고,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한 대작도 아니며, 감독인 강형철도 데뷔작 ‘과속 스캔들’에 이은 두 번째 연출인데 무슨 힘으로 극장가 박스오피스 1위를 달렸을까. 일부에서는 여고시절 왈가닥클럽의 ‘우정’이란 주제가 요즘 한국사회 대중문화를 석권하고 있는 세시봉 같은 복고풍 음악과 절묘하게 매치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 영화는 70~80년대 유행했던 음악들이 영화장면과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꼭 이것이 흥행요소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보기엔 영화 ‘써니’의 장점은 가족 뒷바라지와 생계에 지쳐 꿈을 잃어가는 중년여인들에게 학창시절의 추억을 되살려주고 고달픈 현실의 삶을 위로하는 데 있다. 현실이 고달플수록 추억은 아름답다. 이 영화는 추억의 재생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불가능한 꿈도 실현시켜 준다. 영화 끝 무렵에 여고시절 7공주클럽 써니의 대장인 하춘화(진희경)가 암으로 죽어가면서 자신의 재산으로 6명의 여고시절 클럽 회원의 노후연금을 모두 가입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집 없는 친구에겐 집을 마련해주고, 가난한 친구에겐 통장도 넘긴다. 건설회사 사장부인인 홍진희가 “나는 왜 안주냐고”고 앙탈하자 죽어가는 대장은 “이년아 너는 돈이 많잖아”하고 일침을 가한다. 감독은 이 영화를 눈물과 웃음을 교차시키면서 관객의 눈과 가슴을 노크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따뜻함이 난류처럼 흐르고 있다. 이 영화의 매력은 바로 살벌한 세상을 살아가는 중년여인들의 삶을 위로하는 따뜻한 손에 있다.
나는 영화 ‘써니’를 예술영화나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험적인 영화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흥행을 목표로 만든 영화다. 이 영화의 작품성 평가를 제외한다면 이 영화의 장점은 많다. 우선 관객 타깃을 40~50대 중년여인으로 확실하게 겨냥했다. 그리고 요즘 풍미한 복고조 바람을 타고 날개를 달았다. 이런 기획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영화기법 면에서는 디테일(세부묘사)이 아기자기하게 살아있고, 템포감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영화전개가 물처럼 막힘이 없다. 내용에서도 세속적인 흥행 포인트를 얄미울 정도로 잘 잡았다. 두 편을 연출한 신인 감독이지만 관객동원의 맥을 제대로 집었다.
인간의 죽은 영혼을 되살리는 작품성은 없다고 해도 암으로 죽어가는 써니 클럽 대장의 재산분배를 통해 영화로 비현실성(인간의 한계)을 현실화 했다. 현실의 삶이 고달픈 서민들은 영화를 통해서나마 꿈의 실현을 대리체험 하고자 한다. 현실에서는 지극히 불가능하지만 영화에서는 우정이 가난을 해결해 준다. 보험유치 실적이 맨 날 최하위인 보험설계사 친구는 보험여왕에 오르고, 인생유전 끝에 변두리 술집 호스티스로 전락한 친구는 딸과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얻는다.
여고시절 써니 클럽 대장 진희경이 암으로 죽어가는 사실을 안 유호정은 죽어가는 대장에게 여고시절 7공주클럽 멤버들을 만나게 해주기 위해 지금은 소식이 끊어진 옛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이때부터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왕래하며 추억과 현실을 교차시킨다. 시간의 터널을 오고가면서 이 영화의 디테일은 빛을 발하고 중년 여인의 감성에 불을 붙인다. DJ가 있는 음악다방이 나오고, 그 시절 음악이 흐르고, 민주화를 외친 데모대가 시가지를 누비고, 여고생과 남대생의 풋사랑과 실연이 장면을 장식한다.
이 영화가 추억의 감상(感傷)으로 빠지지 않게 버팀목을 해준 것은 코미디 신이다. 나미(유호정)는 여고시절(심은경) 전남 벌교에서 서울 진덕여고로 전학 온다. 나미는 공부는 잘 하지만 사투리와 굼뜬 행동으로 이지매를 당한다. 써니클럽 대장 춘화는 나미를 클럽에 가입시키고 보호한다. 극중에서 나미의 사투리와 소녀시대 왈가닥클럽과의 집단 대결 1대1 싸움은 치기가 흐르지만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한다. 무서워서 벌벌 떠는 나미의 행동을 신기로 오해하고 상대클럽이 물러나는 장면은 유치하고 현실성도 없지만 관객들은 폭소를 터트린다. 나미의 고향이 대한민국 232개 시 구 군 중에서 왜 하필 벌교인가. 지명 하나에도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예부터 “벌교에서 주먹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유행했듯이 벌교는 주먹의 대명사 지역이다.
이처럼 강형철 감독은 예술성의 거창한 메시지보다 일상의 디테일에 집착하며 재미로 승부를 걸었다. 그리고 라스트 신인 장례식을 ‘울음의 바다’가 아닌 ‘축제의 무도장’으로 만든 예절의 반란도 돋보인다. 마지막 변호사의 춘화 유언장 낭독도 중년여인의 비현실성 꿈을 영화로 충족시켰다는 점에서 극장을 나서는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일상의 고달픔을 영화 한 편으로 위로받았다면 입장료는 아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