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장군이 1545년 출생 임진란에 1598년 전사하셨으니 금년 4월 28일은 탄신 4백66회 되는 날이다. 세계 3대 명장중에서도 조국에 충성심과 그의 뛰어난 인품과 전술은 세계 해군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더구나 수군통제사에서 전사 할때 까지의 진중일기 7권은 국보76호로 지정되어 있다. 탄신일을 맞아 국가 행사이던 기념행사를 정부에서 주관하던 것이 슬그머니 지방청 행사가 되어버렸다.
평소 충무공을 존경해왔다. 2005년에 난중일기를 양력으로 새로운 문장으로 품격있게 출판 하고 곰팡이진 난중일기를 컴퓨터로 스킨받아 한지에다가 영인본도 진품처럼 제작한바 있다.
그후 일본어판이 일본 동양문고에서 소책자로 3권 1질이 키타지마 만지 (北島 萬智번역으로 출판 되었다. 우리도 이제는 영문판이 필요함에 출판된 책의 유무를 알아보니 1977년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난중일기 (NanJug iIgi )가 출판되었음을 알고 기뻐하며 1권을 구입하여 보았다. 연세대 하태웅교수 번역에 손보기 교수의 편집으로 아담한 책자로 꾸며졌다. 여기에 여진(女眞)은 사람이 아니며 나의 진 (余陣)을 글자 그대로 여자로 본데서 오역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 중 커다란 오역은 다음과 같다.
원문을 보자
1)丙申 九月 十二日 乙巳 風雨 (1596.11. 1. 이용호난중일기 양력표기))
娩出, 登途 十里許川邊,李光輔, 輿 韓汝璟. 佩酒來待 故下馬同話 而風雨不止 安世熙
暮到 茂長宿( 女眞)
문제는 여진에 있다. 원문 책에는 본문과는 상관없이 자기 나름대로 암호 같은 표식이었다. 충무공은 이두(吏讀)를 많이 난중일기에서 보인다. 석세(石世)를 돌세 로 읽는다. 일기에 혹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안될 내용은 이두로 써고 버리는것이다. 정조때 판각했을때는 아주 지워 버렸다. 여진(女眞)을 사람이름으로 착각한 것이다.
해설: 늦게 길을 떠나 십리쯤되는 천변에 오니 이광보와 한여경이 술을 갖고 와서 기다린다. 한세희도 왔다. 저물어서야 무장에 도착하여 잤다. 그러면 되었는데 ‘친’을 데리고 곤한 잠에 들었다. 여진(女眞) 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즉 체종에 가서[P249--12. ul-sa A rainstorm raged Departed iate. when l came to a stream ten li (a bout theree miles) away .yi kwang bo and Han yo-kykong .were waiting for me. holding some bottles of wine in the strm An se hui also came to join us the dringking party .After dark I arrived in Mujang to rest overnight--< spent the night with chin.
P250
P 250 十四日 丁未 晴
Cree 留又
무장에서 머물렀다.
.styed one more day in Mujang .,< the second night with chin > . 본문과 상관없는 사족 (蛇足)을 붙여 놓았으니 충무공이 피곤 한데도 이틀째 같이 잤다로 해석된다.
3)십오일무신(十五日戊申) 15, Musin Clear
체상행차(體相行次) 도현(到縣) 인배(人拜) 의책(議策) (여진(女眞) 삼십(三十))
체찰사가 현(縣) 무장 현에 도착했다 하므로 들어가 절하고 대책을 논의 했다.
Mu-sin clear.
When the party of the supreme Commisioner entered the town. lgreeted him and him and discussed staartegy <.spent the third night with chin .>
몸이 피로하지만 세 번째 밤 잠자리도 같이 하였다.
이두(吏讀)를 모른 탓도 있고 상식적으로 읽어보아 그럴듯도 하다 . 그러나 女眞이 이두임을 알고 보면 간단한 것을 갖고 글자대로 계집이란 말이 나오니 이런 오해도 있을 만하다. 소설이 아닌 일기번역에서 볼때 큰 실수다. 다시 교정해야한다.
‘칼의 노래’( 김 훈 소설)에서도 병인년 가을 여진을 덮치다.
김훈의 ‘칼의 노래’ 에서도 우연히 병신년 가을 여진을 덮쳤다 라는 말이 나온다. 병신년 9월에 여진이 삼일간 등장 하였던바 거기에서 너무 사건 기복이 없으니 한번 남자의 본성을 보여주자고 한것같다. 왜냐 하면 A 해군 참모총장과 작가가 만났을 때도 김훈은 이두라는것을 생각 한것 같지 않다. 표현 또한 진하다.
전쟁소설일수록 여자관계가 주로 독자들의 심금도 울리고 짜릿하고 아련한 추억담도 갖게 한다. 이순신 장군이 아니고. 또 난중일기가 아니라면 하등의 시비 거리가 될 수없다.
해군 참모총장도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작가를 만난 것으로 알려지니 성의 또한 대단하다.
병신년의 정국은 혼란에 빠지고 왜군은 육지에서 나오지도 않고 애를 먹였다.
이순신장군 주위에는 옥지 금희 같은 수발하는 소녀들과 종이 따르게 마련이다.
돌세라는 당번병은 한자로 석세 (石世)다 이두로 사람 이름도 있다. 보통 넘는 고집과 생활 원칙이 있있던 분이다.
초판 (2001)도 한번 읽었다. 지금 갖고있는 책은 35쇄의 책인데 44개 항목으로 읽기 쉽게 나누어져 있다.
네번째항 ‘칼과 달과 몸’에서 여진의 병신년 가을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나는 병신년 가을에 처음으로 여진을 품었다.
-- 밤늦게 함평 현감이 내방으로 술상을 들여보냈다. 여진은 술상을 들여온 관기다. 그때 서른살 이라고 했다-- --그날밤 나는 여진을 품었다 --그여자의 몸속은 따스하고 조붓했다--여진은 쉽게 수줍음을 버렸다. 여자의 몸은 출렁거리며 나에게 넘쳐 왔다. ----그날밤 나는 두 번째로 여진을 품었다. 그여자의 몸은 너그러웠다.·---대강 그런 표현들이다. 연세대 영문판에 ‘친’은 3회에 걸쳐 이순신이 같이 자는 것으로 나온다. 난중일기에는 9월 12일 13일 14일 세 번 나타난다. 횟수가 우연이 아니라 성인이나 위인을 평범한 사회시민 다루듯 하기가 어렵단다. 80년대 교황이 한국에 올무렵 나는 대학문화사에서 이병주 작가에게 김대건 신부의 소설을 계약했다. 불과 한달여를 남겨 놓고 배상은 얼마든지 할것이니 계약을 파기 하자고 했다. 위대한 성인을 어떻게 평민처럼 취급 할수도 없고 하니 끝내자는 것이었다. 김대건 신부가 상해에서 오고간 서신으로 얽어 마무리하여 일단 책은 나왔다. 재미는 못보았으나 80년 국제 한국 펜 문학상을 받았다. 길가다가 돌에 채이듯 김훈까지 넣어서 난중일기 오식을 예로 들었다. 4․28 행사에 즈음하여 국보 76호 난중일기를 정성들여 읽고 공부하는 태도를 모든 국민들이 가졌으면 한다. 마땅히 연세대 출판부에서는 재판시 수정 해야할 것이다<.글쓴이: 전 명지대.난중일기 번역.영인본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