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입춘도 지난 오늘 이 땅엔 매서운 칼바람만 휘몰아친다. 아직도 엄동설한의 한복판. 그러나 봄은 멀지 않은 곳에 와있을 터다. 60년의 장구한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 남과 북을 갈라놓은 냉엄한 철책도 이제 녹이 슬어 허물어질 때가 되었건만 진정한 해동(解冬)은 언제나 오려는지, 새 날, 새 땅의 기운과 에너지를 만들 준비를 서둘러야 할 때이다.
좀 성급한 봄맞이를 위해 비운의 섬, 오키나와를 다녀왔다. 이번 역사기행은 청명한 하늘과 태평양의 기(氣)를 호흡하며 새날을 준비하는 시간, 또한 자연충전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렇게 역사의 아픔을 씻는 치유(治癒)란 마음 속 깊은 성찰과 평화의 갈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는다.
‘오늘의 불행은 언제인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라고 나폴레옹이 말했듯이 역사를 무시하면 역사로부터 보복 당한다는 진리를 믿으려 한다. 또한 ‘역사는 역사로 끝나지 않고 어떤 결과로 오늘 존재한다.’는 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오키나와의 슬픔을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이유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더구나 최근 역사의 과오를 잊은 일본정부의 우경화 폭주(暴走)로 세계의 비난여론이 들끓고 있는 때여서 일본남단의 섬에서 느끼는 역사인식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처럼 태평양전쟁 최후의 격전지 오키나와는 아물지 않은 상흔(傷痕)으로 남아있지만 투명한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 그리고 청정한 바다라는 천혜조건으로 보면 축복받은 땅이기도 하다.
지난날 스포츠 세계제전을 참관하기 위해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삿포로와 나가노 그리고 아시안게임을 연 히로시마를 돌아본 적이 있다. 특히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는 원폭피해의 아픈 역사와 함께 왜 평화가 소중한 것인지 되새겨 보았다. 오키나와 역시 그러한 비운의 섬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벌어진 태평양전쟁의 참상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태평양에서 남, 동지나해까지 그 넓은 바다는 근래에 와서 강국들의 각축장이 되어 영일(寧日)이 없다. ‘동양평화론’를 이야기하기는커녕 일촉즉발의 위기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먼 옛날 16세기 때 이미 중국에 복속되었던 류큐왕국의 실체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최후의 사령부가 있었다는 동굴 그리고 일본패망을 앞두고 원주민 집단자살극, 미국점령 공군기지에서 일본에 넘겨진 과정 등 혼미했던 역사를 떠올리며 그 현장을 돌아보았다. 무엇보다 일제강제징용의 제물이 되었던 한국인의 혼백(魂魄)이 바람에 날리며 떠돌고 있는 듯 했다. 한국인전사자가 1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430명의 이름만 확인된 상태다. 이 가운데 한국적은 231명, 나머지는 북한출신이라는 이야기다. 이 역시 비극이다.
한국인 위령탑이 서 있는 섬의 남단 마부니 언덕에는 새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가 뒤엉켜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40년 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특명으로 이곳에 세워졌다는 한국인위령탑엔 영령들께 바치는 노래가 적혀 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은 감동적인 시, 몇 구절을 옮겨 본다.
<바라보면 조국은 원한의 먹구름/ 첩첩이 쌓이고 가린 천리만리/ 역사의 흙탕물 폭포같이 쏟아질 적에/ 양떼처럼 희생의 제물이 되어/ 바다 하늘 맞닿은 곳으로 끌려와/ 광풍에 생명의 등불 꺼지던 날/ (중략) 피를 머금은 저주의 원혼들/ 광풍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올라/ 불의의 가시덤불 활활 태우고/ 다시 밝아진 뜨거운 태양아래/ 눈부시게 영롱한 자유의 깃발/ 겨레의 얼은 영원한 것(후략)>
옥빛인가, 에메랄드빛인가, 영롱한 바다와 저 투명한 하늘은 알고 있겠지. 파도를 향해 소리치며 바람에 물어본다. <하늘이시여, 민족의 그 슬픈 역사와 함께 외로운 영혼을 돌보아주소서.>
나의 위령기도는 이것으로 끝날 수 없었다. 평화의 광장 돌무덤 틈새로 솟아나 바다바람에 흔들리는 한 생명, 이름 모를 나무를 보았기 때문이다. 위령탑에 새겨진 평화기념(祈念)의 뜻은 기구하는 사람들의 염원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가져간 돌들이 거대한 무덤을 덮고 있으니 그대들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공원주변에서 본 히비스커스라는 이름의 새빨간 꽃송이는 우리의 무궁화를 그대로 닮았으니 배달의 후손들이 그대들의 혼을 지켜 주리라. 따뜻한 한겨울에 피는 칸자쿠라 라는 벚꽃은 붉은 색을 자랑할 뿐 무궁화의 위엄과 끈기를 결코 이기지 못한다.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이 언덕에서 저 꽃과 나무, 하늘의 새들은 증언하리라. 전쟁의 깊은 상처를- 그리고 제 나라를 잃어버린 채 독립을 갈망하는 이곳 섬사람들의 꿈을- 마부니 언덕의 바람은 말이 없으되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듯 부드럽고 싱그럽다. 201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