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조선과 일본이 벌인 전쟁을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올해는 임진년으로, 임진왜란 발발 4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임진년, 이해를 맞이해 새삼 그때와 이 시대를 비교 평가해 보면서 새로운 정세를 예측해 본다.
16세기 끝 무렵, 조선 내부 사회는 복잡하게 돌아갔다. 조선이 건국한 뒤 몇 백년 동안 태평을 누리면서 지내오다가 이 무렵 정치적 사회적으로 분열의 양상을 보였다. 벼슬아치와 유림들은 당파를 지어 권력투쟁을 치열하게 벌였다. 곧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 서로 살육을 저지르는 사화(士禍)를 연달아 일으켰고 하루도 쉴 날이 없이 당쟁을 일삼았다.
더욱이 1889년 당쟁의 여파로 정여립모반사건이란 이름 아래 1천여 명의 사림이 떼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어 일대 분열상을 연출했다. 이런 현실에서 벼슬아치들의 부정부패는 만연했고 양반 상민을 가르는 신분차별과 평안도와 함경도를 소외시키는 지역차별이 격심해져 민심은 유리되었다.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어나 국내를 통일하고 대륙진출의 헛된 꿈을 꾸고 있었으며 만주일대에서는 여진족이 세력을 떨치고 일어나 쉴 새 없이 국경지대를 침입하고 있었다. 여진족을 통일한 누루하치는 여진족들을 모아 새로운 왕조의 건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국내에서는 당쟁을 일삼으면서 국제정세를 외면하고 있었고 일본의 요구로 통신사를 보내면서도 일본의 침략음모를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은 무수한 간자(間者)를 보내 조선의 사정을 염탐하고 있었고 왜구를 통해 군사력과 방어능력을 탐지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일본 지도로 바꾸겠다고 호언했다. 마침내 일본은 병력 28만 2천여명이 현해탄을 넘어왔는데 조선의 지리와 실정을 잘 아는 140여 명을 각 부대의 안내자로 배치했다.
일본군이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충주에서 신립의 군사마저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북진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신하 200여명을 데리고 서울을 비우고 허겁지겁 북쪽으로 도망쳤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은 우리 국군이 북진한다고 하며 남쪽으로 피신했으니 비교가 됨직하다.
일본군은 부산포에 상륙한 지 한 달이 못되어 서울을 무혈 점령했다. 이어 북진을 거듭했다. 선조는 의주로 옮겨 기거하면서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명나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뜻)이라 말하면서 군대를 보냈다. 명나라 군사들은 먼저 군사 지휘권을 거머쥐고 압록강을 건너와 평양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초기에는 패전을 거듭했다. 어렵게 임진강을 건너 서울로 입성해서는 관군을 앞장 세우고 뒷전에 물러나 있으면서 일본군과 다름없이 약탈을 일삼았다.
우리의 의병은 곳곳에서 일어나 관군과 명군을 도와 승리를 기록했고 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남해 전역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명군은 일본군과 강화를 벌이면서 우리 대표를 제외시켰다. 외교권마저 빼앗아 간 것이다.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물러가며 7년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일본군의 만행은 나날이 더해 갔다. 전쟁터에서 우리 포로를 잡으면 손바닥을 뚫고 줄로 꿰어 앞에서 끌고 갔으며 마을에 들어가서는 방화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런 정도는 어느 나라 군대라도 저지르는 만행일 것이다.
일본군은 부녀자를 약탈해 가서 군영에 두고 현지처로 삼기도 했고 밥짓고 빨래하는 일을 강요했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자살을 하기도 하고 산골로 도망치기도 했다. 방화의 대상은 종묘나 궁궐 등 관아건물만이 아니라 서원 향교 그리고 부호의 집들이 모조리 포함되었다. 국토는 우리나라 역사 이래 최대의 피해를 입었다. 명나라 군사들도 일본군과 다름없이 약탈을 일삼았다. 그래서 유성룡은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다”고 기록했다. 명군이 더 악랄했다는 뜻이다.
이 7년 전쟁은 우리 역사 이래 가장 큰 피해를 입혀 조선의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무수한 문화재가 파괴 약탈되었고 수 십만 명이 살상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특히 유린을 당한 부녀자들은 산골로 도망쳐 살거나 자살하는 사태를 빚었다. 무엇보다 군사지휘권과 외교권이 명나라에 넘어가 주권이 유린되는 사태를 빚었다.
우리 조정은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긴 것은 민족감정으로 보아 나무랄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에 대해 지나치게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에 사로잡혀 없어진 명나라 연호를 쓴다든지, 새 중원의 주인이 된 청나라를 깔본다든지 하는 따위 자주의식이 마비되었다. 실학자 이익은 “명나라가 구원군을 보내준 것은 자기 방어를 위한 것이니 지나친 은혜의식은 버려야 한다”고 갈파했다.
이런 역사경험은 오늘에도 교훈을 준다. 지난 4년 동안 남북의 긴장관계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진위를 따질 것 없이 남북대화가 단절된 속에 천안함 연평도 사태가 일어났고 이어 북한에는 전대미문의 3대 세습체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위급한 현실 속에서 정치인들은 정권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권모술수를 부리면서 적절한 미래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
만약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전쟁이 일어나거나 북한이 중국으로의 예속이 가중되는 사태가 와서 통일이 멀어진다면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민족의 죄인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을 앞두고 벌인 당쟁세력과 다름없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오늘의 정치인들은 진정 민족통일이란 과제를 두고 정권의 이해 차원에서 벗어나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역사경험은 미래 시대에 하나의 거울이 된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임진년은 흑룡(黑龍․북방에서 활동하는 용)이 활동하는 해라고 하니 북방의 사태를 면밀하게 살펴보는 형안이 요구된다.
* 이이화(李離和)
1937년생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서원대 석좌교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역임. 쉽고 재미 있 는 글쓰기를 통한 역사 대중화와 현실문제와 연결되는 역사운동에 앞장 서왔다.
저서로 <한국사 이야기>(전 22권), <인물로 읽는 한국사>(전 10권), <만화 한국사>(전 9 권), <한국의 파벌> <허균의 생각> 등 다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