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에서 온 외계인의 횡설수설이 아니다. 대학생이 제출한 기말고사 보고서 문장이다. 담당 교수는 ‘ㄷㅊ(닥쳐)’라고 써서 돌려줬다고 한다. 청소년층이 즐겨 쓰던 ‘문자단순화’는 문자메시지와 카카오톡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전 세대로 확산되는 추세다. 대학생이 이런 수준이니 초중고생에게 제대로 된 문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안중근 의사(義士)’를 의사(醫師)로 알고 “그분은 어느 과목을 진료하셨느냐”고 물었다. 교수가 “베이징에 출장 간다”고 하자 “북경(北京)은 안 가느냐”고 묻는 대학생도 있었다. 한글표기 ‘동음이의어’의 뜻을 이해 못하고 ‘한자 문맹’의 서글픈 현상으로 신문에 난 사례다. 의미의 혼란을 넘어 어휘체계가 무너진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글쓰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많이 읽고, 많이 써 보고, 많이 생각해야 글쓰기가 늘기 마련인데 독서도 리포트에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읽는다니 글쓰기가 늘 턱이 없다.
눈높이 맞춘 교안과 PPT는 기본
글쓰기는 어렵다. 공감 주는 맛있는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다. 글쓰기보다 어려운 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다. 중등학교에 작문교사가 드문 것도 글쓰기 지도가 어렵다는 반증이다. 작문과목을 개설하여 국어교사에게 맡아 달라고 하면 손사래를 친다는 게 현실이다.
글쓰기 강의에 앞서 교육목표와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교안과 PPT준비는 기본이다. 흥미유발용 동영상은 시선 끌기에 좋다. 사례를 많이 제시하고 과제물 첨삭을 통해 글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화려한 경험담은 맛보기에 그쳐야 한다.
신문동아리 등 방과 후 수업시간을 활용한 글쓰기 특강은 그런대로 아이들이 집중한다. 정규 수업시간은 대부분 분위기가 산만하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엎드려 자거나 옆자리 친구와 떠드는 건 예사다. 교사가 훈계해도 ‘인권 침해’라며 막무가내로 대드는 아이들에게 외부 강사가 집중력을 높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현대판 유목민’ 군인자녀 기숙고교
한국언론진흥재단 NIE특임강사 4년 차. 지난 3월 개교한 경기도 파주 한민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2주 동안 ‘창의적 글쓰기’ 특강을 진행했다. 배정을 받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직업군인 자녀들을 위한 기숙형 사립고교다. ‘올바른 국가관과 인성을 갖춘 창의적 인재를 양성한다’는 건학이념으로 ‘한민’고 명칭도 ‘대한민국’의 중간 두 글자를 따서 지었다. 군인자녀 교육기관으로 1970년 서울 중경고등학교와 춘천제일고등학교가 설립됐으나, 중경고는 일반고로, 춘천제일고는 1982년 강원사대부고로 전환된 이후 32년 만에 처음이다.
천왕성 담당 선생님에게 전화하여 아이들의 학력수준을 파악했다. “내신 200점 만점에 190점 이상 받은 학생들로 성적이 우수하다”고 한다. 학생들의 수학능력을 파악하는 것은 교안 작성의 전제조건이다. 중3과 고1은 대개 엇비슷하게 교안의 눈높이를 맞추지만 한민고는 예상대로 달랐다.
학생들의 표정은 해맑고 푸르다.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신록을 닮았다. 복도에서 만날 때 마다 깍듯이 인사한다. 품성 곱고 예절 바르다. 집중력이 빼어나 50분이 짧게 느껴졌다. 강의 자료를 복사해 달라는 학생도 있고, 첨삭지도를 받겠다며 이메일 주소를 요구하는 학생 등 적극적이다.
글쓰기가 왜 필요한지, 문장쓰기의 일반적 유의점은 무엇인지, 신문을 활용한 논술 준비 등은 PPT로 개념만 간략하게 소개한 뒤 유인물로 대체하고 ‘고기 잡는 법’에 강의시간 대부분을 할애했다.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상은 암기형에서 사고(思考)형으로 바뀌고 있다. 최근 실시한 대기업의 입사 시험문제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종합적인 사고를 가진 창의적 인재를 요구한다.
‘세종대왕과 외계인이 만났다면 어떤 대화를 할지 서술하라’는 명문대의 창의에세이 문항도 독특한 시각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상상력과 달리 창의력은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 창의성을 마케팅에 활용하여 대박을 낸 사례와 역발상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심청전’의 주제는 효이지만, ‘심봉사와 마을주민이 공모한 심청살인사건’(이정원 ‘傳을 범하다’)이라고 규정한 교수의 저술을 소개하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관심을 드러낸다.
수업활동지로 칼럼을 읽고, 근거와 내용 요약, 나의 중심생각을 발표하게 했더니 비판적 생각이 의외로 많아 놀랐다. 칼럼 사례도 저명인사 보다 강사가 현직 때 '발로 쓴 칼럼‘과 최근 여행 칼럼을 소개하니 근접성 때문인지 “와∼우”하며 반긴다. 배우면서 가르치고 가르치면서 배운다. “2주라는 시간이 아쉽습니다. 아이들도 저도 참 행복했습니다.”라는 담당 선생님과 “좋은 강의와 자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학생의 메일을 받으니 어께가 으쓱해진다.
인성․진로교육 등 강의 영역 넓혀야
문필가나 기자가 아니더라도 글쓰기는 평생 과제다. 자소서, 리포트, 논문, 직장의 보고서와 기획안도 문장력이 탄탄하면 돋보이게 마련이다. 음식점 홍보 전단지도 감칠 맛나게 쓰면 구미가 당긴다. 글은 미사여구 보다 문장은 짧게, 진솔하게 써야 감동을 준다. 잘 쓰려고 하기보다 잘못 된 습관만 고쳐도 좋아진다. 글쓰기 과제도 중요하지만 퇴직 언론인의 경륜을 활용한 인성교육과 진로교육 등 범위를 넓혀 갈 것을 제안한다.
●잠깐 한 말씀 / 김태영 ‘한민학원’ 초대 이사장
“학교신문 통해 글쓰기 기회 제공”
‘한민학원’ 초대 이사장인 김태영 전 국방장관(사진)은 결혼 35년 동안 29번 이사를 했기에 군인자녀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학교설립은 법령에 의해 국방부의 뒷받침이 있었지만 운영은 그가 짊어져할 몫이다. 재정적 뒷받침 계획을 물었다. “최근 발족한 사단법인 ‘군인자녀교육진흥원’을 통해 운영자금을 모으고 있는데 동참하는 분들이 늘어나 고무적이라”고 한다.
평소 글쓰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김 이사장은 “한글과 영어로 된 학교신문을 주기적으로 발행하여 학생들에게 글쓰기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군․관계를 거친 뒤 교육자로 변신한 그는 “전문성과 소통능력을 갖추고, 솔선수범을 할 때 강력한 리더십이 발휘된다.”며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저도 한 마디 / 한민고 1학년 강진솔 양
“안정감 찾아 공부하기 좋아요”
“공군인 아버지를 따라 17년 동안 13번 이사를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 전학이 잦아 친구들을 사귀고 적응하는데 무척 힘들었어요.” 한민고 1학년 강진솔 양(사진)은 “소속감과 안정감을 찾아 공부하기 좋다”며 환하게 웃는다.
“드라마 프로듀서가 꿈”이라는 진솔 양은 “지금 선생님들이 하시는 것처럼 끊임없이 공부하라 자극해 주시고 용기를 불어 넣어 달라”고 주문한다. “한민고 1회 입학생으로 저희들이 잘 해야 학교가 명문으로 발돋움 할 수 있기에 어깨가 무겁다”며 어른스럽게 말한다. 19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