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를 쓴 나의 심정 그대로 어머니는 나의 영원한 기쁨이었다. 그냥 좋았다. 72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선물을 안겨드리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누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마치 영원히 사실인 것처럼 믿고 지냈다. 결혼 후에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매일 저녁 어머니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었다.
누구나 어머니에 대한 감회는 각별할 것이다. 훌륭한 어머니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중에도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수필가 피천득선생은 ‘엄마’라는 글 가운데 어머니를 이렇게 예찬하고 있다.
<엄마가 나의 엄마였다는 것은 내가 타고난 영광이었다. 엄마는 우아하고 청초한 여성이었다. 그는 서화에 능하고 거문고는 도에 가까웠다고 한다. 내 기억으로는 그는 나에게나 남에게나 거짓말 한 일이 없고, 거만하거나 비겁하거나 몰인정한 적이 없었다.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요, 내가 많은 결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버려 그의 사랑 속에서 자라나지 못한 때문이다.>
생전의 피선생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 여쭤본 적이 있다.
“살아오시면서 아쉬웠던 일은 무엇인지요?”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대문을 들어설 때 엄마아 하고 부를수 없었던 일…”
이 말씀에 가슴이 뭉클했다. 마음껏 매달려 응석을 부리고 싶은 나이에 어머니가 아니계신 목마름, 외롭게 자란 허전함이 절실하게 부딪쳐왔다.
나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나의 어머니는 감정이 섬세하고 조용한 분이었으나 주관이 확실했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인사동에 제일모사점을 열고 운영했다. 서울분인 아버지는 예법을 중요시해서 식사 때나 어른 앞에서 자세가 바르지않으면 찡그리셨다. 아버지 서재에서 책을 꺼내 읽으면 똑바로 꽂아놓아야 했다. 아버지가 소리내어 꾸중하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지금 아버지가 계시는데…” 혹은 “아버지가 곧 돌아오실텐데…”하고 간접경고를 하기 때문에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의 존재감이 뚜렷했고 어렵게 여겨지기는 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그런 가정분위기가 사는데 필요한 기본예절을 몸에 배게 했고 남에 대한 배려와 사양의 미덕을 은연중 알게 했던 것 같다.
50년대 후반 내가 한국일보 기자시절 결혼을 하면서 당시 사회관례대로 퇴직을 했더니 어머니는 “너는 신문사 일도 적성에 맞는 것같고 외아들과 결혼했으니 평생 집에서 시부모 모시고 사는 일이 힘들지않겠느냐”고 점잖게 돌려 말씀했다. 시집살이경험자로서의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나는 다시 기자생활을 했고 그후 20여년을 언론계에서, 그 후로도 사회활동과 문학활동을 계속하면서 보람있게 지낸 것이 어머니 덕이라 하겠다.
근래 어린자녀를 학대하는 나쁜 부모기사가 날때마다 너무나도 슬프다. 한 가정에서 부모는 태양이다. 그 태양빛의 포근한 사랑에 힘입어 어린 새싹같은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 건강한 가정인이 되고 사회인이 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은 또한 부모은공을 마음깊이 안고 사는 것이다.
시인이 된 딸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내 손을 꼬옥 잡아주시던 어머니. 이제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으니 그것이 가장 마음 아프다. 5월 어버이날은 부모와 가족에 대한 애틋한 정을 새기고 추억하고 그리워하게 하는 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