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자유중국은 역사적으로 매우 긴밀한 형제국가라고 할수있습니다. 그런데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권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반공자유국가인 한국이 공산체제(중공)과 외교관계를 추진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우리는 한국정부와 국민들의 양식과 의리를 굳게 믿습니다…”
1992년 연초부터 중공(당시 일반적 호칭)의 요인들이 잇달아 방한하고 한국-중공과의 수교설(修交說)이 나오자 자유중국 (대만)정부는 바짝 긴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교설은 더욱 꼬리를 물었다.
앞의 말은 정식수교 한달 전에 김수기(金樹基) 주한 자유중국대사가 한국언론계 중진 6~7명을 명동의 대사관저로 초청한 자리에서 “절대로 사실이 아닐것”이라며 역설했던 얘기다.
이미 노태우정부가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수교방침을 정한 사실을 알고 있던 필자로서는 그날 마음이 착잡했다. 대만과 끈끈한 형제국가임은 사실이나 한국으로서는 시대적 대변화도 그렇고 장차 북한문제와 관련, 수교는 어쩔수 없는 추세 아닌가.
다만 정부에 대해 중공 및 대만과의 ‘동시수교’가 최선이고 불연일 경우 대만과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등은 어떠한 형태로든 유지돼야 한다고 역설해온 터였다. 아울러 중공과 수교때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한반도의 통일을 무산시킨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과 내지 유감 표명을 문서나 성명에 명시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바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기회를 놓칠세라 수교를 서둔 정부는 우리측 주장을 관철시키는커녕 저들의 대국(大國)주의식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음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즉 “중공은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이고 대만은 부속도서라는 것, 대사관의 건물 등 한국에 있는 대만대사관의 모든 재산을 넘기라”는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외무부는 1992년 8월18일 대만측에 북경당국과의 수교협상의 급진전 사실을 처음으로 알리고 3일후에는 김수기대사에게 “24일 수교협정에 가조인(假調印) 한다”고 공식 통보했다. 이에 대만의 조야(朝野)가 경악하고 분개한 가운데 다음날 첸푸(錢復))외교부장은 박노영(朴魯榮) 한국대사를 불러 강력한 유감표명과 함께 5개항의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즉 대만정부는 23일자로 한국과 국교를 단절, 단교(斷交)와 관련한 한국의 특사파견을 거부, 한국과 항공협정 무효, 한국에 대한 무역우대조치 취소, 그리고 자동차와 모든 과일류의 수입을 전면금지하겠다는 것이었다. 대만이 한국에 대해 먼저 단교를 선언한 것이다.
그날부터 한동안 한국대사관에는 계속 시위대가 몰려와 ‘한국은 은혜를 짓밟는 배은망덕의 나라’ ‘노태우는 배신자’라고 외치며 계란과 돌을 던져 유리창등 기물을 파손했으며 태극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한국과 대만은 1993년 말과 1994년 초에 서울과 타이페이에 연락사무소(대표부)를 개설했지만 단절과 침묵, 냉냉한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됐다. 단교에 대한 보복이라고 할까. 1997년 대만정부는 원전(原電) 폐기물을 북한과 돈을 주고 넘기는 협상을 한동안 시도해 한국정부와 국민을 자극, 긴장시키기도 했다.
필자가 새삼 대만과의 정치적 외교적인 단절과정을 소개하는 것은 역사는 내일을 살아나가는데 있어 중요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랜만에, 정확하게 24년만에 최근 대만을 둘러보고 왔다. 필자가 이번까지 대만을 방문한 것은 4차례로서 두번은 대만의 초청으로, 한번은 동남아 가는 길에 며칠 체류했었다.
1968년 8월 처음 대만을 처음 방문했을때 수도 타이페이(台北)를 비롯, 기륭(基隆) 타이중(臺中) 타이난(臺南) 카오싱(高雄)등은 조용하고 한적했다. 어디를 가나 우루릉하는 포성과 기관총및 헬기소리가 어우러진 전쟁터인 베트남에서 방금 온 필자에게는 기이하게만 여겨졌다.
당시 대만 곳곳에는 본토를 공산당에게 빼앗긴 장개석총통이 본토수복을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써붙인 ‘處變不驚’등의 구호들이 걸려있었고 만나는 요인들마다 본토 수복과 모택동일당의 축출을 역설했다.
“작년 가을 김종필공화당의장 초청으로 방한했을때 창덕궁의 단풍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대만은 상하(常夏) 지역이어서 단풍이 없어요. 단풍을 보기위해서라도 본토탈환을 서두를 생각입니다…”
총통부에서 인터뷰한 부친인 장총통에 이어 권력 제2인자인 장경국(蔣經國) 국방부장은 영락없이 복덕방 영감 타이프였지만 본토수복을 얘기할때는 눈에서 광채가 번득였다.
그후 22년만인 1990년 대만정부 초청으로 다시 가보니 변화의 분위기가 역력했다. 장경국총통이 12년간 재임 끝에 작고한지 2년후인 이때 안팎으로 변화의 바람이 몰아친 것이다. 서구로부터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공산권이 붕괴됐으며 한국으로부터는 민주화의 열기가 불어온 것이다.
정부와 국민당의 요인들, 지식인들은 은연중에 본토에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변화가 시작되기를 기대하는데 비해 대학생등 젊은세대들은 국민당 일당통치의 틀을 완전히 탈피해 자유민주주의의 개화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작고한 장경국 전 총통이 훌륭한 결단을 내렸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것 아닌가. 그는 시대적인 변화의 바람을 감지하고 안으로는 당정(黨政)등의 과감한 내정개혁, 계엄령해제, 야당인 민주진보당(약칭 민진당)의 창당허용을 통한 다당제시대를 개막하는 한편 총통의 직선제를 예고했다.
그는 본토-중공에 대한 정책도 완화의 물고를 텄다. 본토에서 밀려나온후 무역 교통 우편교환을 금지한 3불통(不通)정책과 1979년 미- 중공수교에 반발해 중공과의 일체의 접촉, 담판, 타협을 금지한 3불정책을 완화한것, 가족상봉을 위한 본토방문의 개시. (1987년 探親法제정) 중공서적의 출판과 판매를 허용한것이다.
2000년은 대만 민주화의 원년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화민국사상 최초로 총통의 국민직선제를 실시한것, 이때 제1야당의 천수이벤(陳水扁)후보가 당선됨으로써 국민당은 50여년만에 정권을 내주고 야당이 됐다.
천총통은 취임후 대만의 독립론과 유엔가입론을 제기하여 일국양제(一國兩制)를 고수하는 중국이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고 발끈해 양안(兩岸)관계가 경직되기도 했으나 1993년부터 시작한 중국과 대만의 반(半)관영 교류회의 지속된 접촉 협의로 양안관계는 극심한 적대에서 지극히 우호적인 이웃으로 날로 변하고 있다.
민진당의 8년 집권후 2008년 총통선거에서 마잉지우(馬英九)후보의 당선으로 국민당은 정권을 탈환했다. 마총통이 취임직후 대만은 독립과 통일을 거론하지않고 무력사용금지를 골자로한 새로운 3不정책을 발표하자 중국은 대환영 했으며 양안관계는 상호방문 관광허용, 상호 투자증가, 각계간의 활발한 교류등으로 전례없는 황금기를 맞고있는 것이다.
24년만에 찾은 타이베이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조용하고 한적했던 수도가 고층빌딩의 숲으로, 자동차의 홍수로 어지러울 정도였다. 1950년이래 매년 10월10일 쌍십절 날이면 수십만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역대 총통들이 본토수복을 외치는 연설을 했던 총통부 건물은 빌딩숲에 묻혀 평범한 건물이 되고 말았다.
세계에서 5번째로 높은 건물인 101층 빌딩은 도약적인 발전을 한 대만번영의 상징으로 우뚝 서있었다. 오랜만에 고궁박물원, 용산사, 중정기념관, 기륭의 야류해양공원, 화련의 대로강협곡, 충렬사를 둘러봤다. 곳곳마다 대만인, 본토인, 해외화교, 동남아인, 한국인, 서구인들이 뒤섞인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20년전 단교에 따른 감정의 앙금과 배타심으로 응어리졌던 한국-대만관계는 세월이 해빙약(解氷藥)인가, 수년전부터 양국의 민항기 왕래가 재개되고 관광객등 인적 왕래와 교류가 급증했으며 특히 교역량이 날로 증가하고 있음은 매우 반가운 일이라 하겠다.
물론 한국은 20년간 다져온 중국과의 다방면에 걸친 협력관계는 더욱 내실있게 호혜펑등의 원칙에따라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대만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국과 대만 양국은 상부상조 해야한다.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인터넷과 스마트 폰 등으로 국경이 무너진 대변화의 시대를 맞아 지난날의 한때 껄끄러웠던 일들을 모두 잊고 새로운 차원에서 더욱더 긴밀한 교류와 협력 관계를 이룩해 나가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