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하십시오.” 낙선자에게는 가장 위로 되는 말이다.
선거의 승패는 한마디로 돈과 조직의 힘이라는 점을 절감했다. 정당조직이 선거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며, 돈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경험했다. 이제는 나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지난 해 경험했던 택배 일을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그리고 남은 인생은 돈 없는 노인들을 위해 지난 3년 동안 일해 왔던 이발 봉사를 계속하고자 한다.
2014년 6.4 지방선거판에 출마한 까닭은 “노인도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후배는 “선배님! 만약 출마하셨다가 낙선한다면, 그 후유증을 어떻게 이겨내려고 그러십니까.”라면서 간곡히 만류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듣고도 한쪽 귀로 흘러버렸다.
그 후부터 나는 초중고대학 친구들이나 선배 언론인들을 만날 때마다 “구의원 후보”로 출마한다는 결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힘차게 말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출마의지를 꺾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거듭 거듭 다짐한 것이다. 선배 언론인들은 “용기가 대단하다”고 격려해 주었다.
아내는 극구 만류
나의 말을 듣던 아내는 “내가 짐을 싸서 나가야겠다.” 면서 강력히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돈도 없으면서 출마했다가 “집 한 채 있는 것 마저 날려버리려고 그런 생각을 하느냐.”면서 나의 기를 꺾어 놓곤 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2014년 3월 22일 첫 등록일이 되자마자 나는 1착으로 서울 광진구 선거관리위원회에 구의원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그 때서야 아내는 못이기는 척하면서 새마을금고에 저축한 아랫집 전세금 1천만원을 담보로 8백만원을 빌려서 선거자금으로 쓰라면서 통장을 내밀었다.
“더 이상 돈은 없으니까 알아서 하세요.” 참으로 나는 용기백배했다. 이제는 자신있게 선거에 임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71세의 아내가 그렇게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워 보였다. 그동안 아내에게 지은 온갖 죄들이 뇌리에 떠올랐다. 지금도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저금한 돈이 한 푼도 없었지만 아내도 따로 저금한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을 후보등록 때 재산 신고를 하면서 확인했다.
돈과 정당 조직이 승패 좌우
선관위에 등록했으니 이름을 알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언론사 논설위원과 국장을 지냈다고는 하지만, 지역에서는 무명 인사였다. 나를 아는 사람은 우리 지역에서 거의 없었다, 동네에 다니면서 나이 드신 분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을 지금까지 본적이 없다.”면서 동네를 위해 일한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투로 이야기 했다. 정말 맞는 말이었다. 내가 동네를 위해 청소를 해 본 적도 없고, 동네 사람들에게 무엇을 베푼 적은 더구나 없기 때문이다.
우선 명함 돌리기에 나섰다. 흔히 서울의 후보자들이 하는 것처럼 전철을 타려는 출근길 시민들을 대상으로 명함을 뿌렸다.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필요 없어요.” 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명함 받는 것이 싫어서 길을 비켜가기도 했다. 젊은이들 가운데는 받은 명함을 바로 땅에 내동댕이치는 경우도 있었다. 지하철 입구에는 명함이 수북이 쌓이기도 했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명함을 돌리면서 마치 “바다에 돌을 던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4일 동안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2,000장을 뿌렸다. 그것이 허공으로 날아갔다는 서실조차 모른 채…
가게에 명함을 내밀면서 “기자 40년” “인생 70” 이라고 말하고는 오승근 가수의 “내 나이가 어땠어!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 인데!” 하는 말을 살짝 바꾸어서 “내 나이가 어땠어! 봉사하기 딱 좋은 나이 인데!” 하고 큰 소리로 이야기 하면, 특히 여성들이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남자 노인들도 “그럼! 그렇고말고!”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 다음에는 각 동마다에서 가장 맛있는 집 몇 곳을 골랐다. 한 집에 평균 10회 이상 연속으로 찾아갔다. 주인과 친하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음식점을 찾는 손님과도 자연스럽게 아는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주민들과 친숙도를 높여갔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야말로 보리밭의 이삭줍기와 다름없었다. 사실 하루 종일 보리밭을 누벼도 한 되 줍기조차 힘들다. 각 동에는 공식으로 20개가 넘는 각종 단체가 버티고 있었고, 동마다 비공식 친목 모임은 수백개에 달했다. 그 모든 모임은 기존 정당들과 연관을 맺고 있어서 짧은 시간에 조직을 파고들기가 무척 힘들었다.
특히 정당투표가 대세였고, 나 같은 무소속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못했다. 결과는 소망의 좌절이었다. 아직 후유증은 남아 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