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그로부터 65년,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을 맺은지도 62년이 지났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6·25전쟁은 지금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정전 상태나 다름없다. 북한은 7월 27일 휴전일을 ‘조국 해방전쟁 승리의 날’이라며 이날을 기념하고 있지만 이는 그들의 광신적 잔치일 뿐이다.
흔히 6·25는 김일성이 일으키고 마무리는 미국이 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판문점 휴전회담이 있기까지 무슨 얘기가 어떻게 오고갔는지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휴전협정 전후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서 정전협정 당시의 취재수첩을 다시 꺼내 회고해 본다.
돌이켜보면 정전협상이 무르익던 당시의 전황은 유엔군 측이 우세하였고 이런 기세 속에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승만대통령이 줄기차게 정전회담을 반대했던 속셈에는 벌써 이때 한미방위조약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1951년 5월 20일 까지 중공의 공세는 약화되고 전세는 국제연합군에 유리한 국면이었다. 이처럼 적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6월 23일 국제연합 소련대표 J. Malik는 상호 38선에서의 철수를 조건으로 정전할 것을 제안하게 된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 참전국지도자들의 입장도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종식 시켜 자국 군인을 한명이라도 덜 희생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에 이런 제의는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연락장교의 회담이 있었고, 그 이틀 뒤인 7월 10일 개성 공산군지역인 ‘내봉장’이라는 한옥 집에서 국제연합군의 대표와 북한 및 중공의 대표가 첫 회담을 갖기에 이른다. 양측 모두 자동차에 흰 깃발을 달고 회담장 까지 가게 돼 있었고 유엔군 측 역시 흰 깃발을 달고 상당한 거리의 적진을 달려 내봉장에 도착한다.
전투경계선은 판문점인데 굳이 개성에서 갖자는 공산 측의 저의도 의심스러웠지만 북한이 유엔 측에 흰 깃발을 달고 오도록 한 것은 뒤에 알고 보니 항복 깃발로 오인케 하려는 술수였다. 북한이 7·27 휴전 일을 전승기념일로 보는 배경에는 이런 억지도 한몫 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휴전회담이 있기까지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거센 반대가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회담장소 비무장화문제로 개성에서의 회담이 결렬되고 1951년 10월 25일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 회담을 재개했다. 국제연합 측에서 미 해군 중장 C. T. Joy제독, 미 공군 소장 L. C. Burke, 한국군 소장 백선엽 장군이 참석하였다. 개성 회담 때는 연희전문학교 언더우드 박사의 아들 3형제가 유엔대표의 통역을 맡았으며 한국측의 이수영 대령도 통역관으로 활약했다.
1953년 6월 8일 공산 측과 유엔 측은 포로교환 일정표에 합의하고 6월 18일 최종 서명하기로 했지만 이승만대통령은 6월 18일 새벽 전격적으로 반공포로 27,000명을 석방하기에 이른다. 유엔은 발칵 뒤집히고 일각에선 이승만박사 납치소문까지 나돌았다. 반공포로 석방 후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부산 경무대로 이승만대통령을 예방하고 ‘휴전회담’을 설명하였는데 이 대통령은 이때 갑자기 클라크 장군의 어깨에 단 별 넷을 움켜잡고 “정전회담은 정치야!” 전쟁은 군인이 하고 정치는 민간인이 하는 것이니 정전회담도 정치인만큼 이 별 떼고 와서 정치적 이야기를 나누자”고 호통 쳐 보냈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급기야 7월 11일 미국에 의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확약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각서가 한국 정부에 전달되었으며, 미국무차관 월터 로버트손이 특사로 내한했다.
결국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사령관을 一方으로 하고, 북한군과 중공인민 지원군 사령관을 他方으로 하는 휴전협정이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서명되고 이날 밤 10시 일단 총성은 멎었다. 이로써 1951년 7월10일 부터 시작된 정전회담은 2년 17일 동안 총 575회의 공식회담 끝에 마무리 되었다. 결국 전쟁기간의 3분의 2는 회담하며 싸운 셈이다. 당시 휴전회담 현장을 취재했던 김진섭 박성환 방낙영 이지웅 이혜복 임학수 최기덕 최원각 한영섭 함태암 기자의 얼굴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휴전회담 진행 중 로버트슨 미 국무차관이 이승만 박사에게 “한국의 안보는 미국이 책임지겠다”고 말한 것은 휴전회담을 조기 성사 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이었겠지만 이 박사는 이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즉석에서 한미 간에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을 제안, 1953년 10월 1일 공식 서명했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덕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 보병 10개 사단 분의 군원과 전후복구원조를 확보하였다. 6·25전쟁 후속조치로 1954년 4월 26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선 ‘한국전쟁에 참전한 모든(19개국)국가의 대표가 참가하여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협의하였으나 동서 양진영의 의견차이로 그해 6월 25일 결국 결렬되고 만다.
이승만대통령은 또 정전 직후인 1953년 11월 27일 대만으로 장개석총통을 방문하고 ‘아시아 민족의 반공전선 결성’을 공동성명으로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 따라 1954년 6월 15일 제1차 아시아 반공연맹 총회가 한국 진해에서 발족된 것은 이승만대통령의 투철한 반공정신을 대변해 준다.
여담이지만 6·25전쟁으로 지친 이승만 대통령은 전후복구를 호소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 1954년 7월 27일 백악관에서 아이젠하워대통령과 회동했다.
도미하기 전 이 대통령은 수 개 월 째 이발을 하지 않아 ‘불쌍한 노인’으로 보였다. 이 대통령이 김포비행장을 출발할 때 기자인 필자는 “이발을 하시고 가실 것을…” 하고 언급하자 이 대통령은 목소리를 낮추어 “도움을 청하러 갈 때는 이 모양으로 가는거야”라고 말씀하셨으며 방미 목표를 달성하고 귀국할 때는 말끔히 이발을 한 모습이었던 것이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뇌리에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