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독립운동에서 투쟁기지는 주로 내국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정착지가 선택된다. 당시 조선이주민의 정착지로서는 중국의 간도(間島)와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Primoskii), 미국의 하와이 등 세 곳이었다. 필자는 광복70주년을 앞둔 7월에 찾은 연해주 곳곳에서 그늘 속에 묻혀있는 독립운동의 잔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최재형(崔才亨·1860~1920)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지도자였고 이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예신분의 아버지와 기생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두만강변의 함북 경원군(慶源郡) 비천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0년대의 잇단 기근기(饑饉期)를 견디지 못해, 부모를 따라 1869년 두만강을 건너, 중국땅을 지나 연해주로 이주했다. 일가가 정착한 곳은 1863년 조성된 한인마을 티신허(Tizinkhe·地新墟)였다.
그의 집은 끼니가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다. 어느 날 배가 고파 최재형은 11세 때 가출하여 이국땅을 헤매다가, 러시아 상선의 선장 내외를 만났다. 선장의 권유로 최재형은 상선의 선원이 됐다. 6년 동안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국제정세를 익혀, 그는 스스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선장내외 덕분에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최재형은 인텔리 청년이 되고, 러시아어에 능통하여 한인노동자들이 고용된 공사장의 통역관으로 일했다. 후엔 인원수가 많은 러시아 극동함대사령부 식료품 납품권을 얻어내, 당대 연해주 최고의 외국인 거부가 됐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최재형은 1905년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반식민지가 되자,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는 연해주에서 번 돈으로 한인들의 집결지 여러 곳에 초등학교 30개를 세우고, 장학회를 만들어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학교에 다니게 했다. 우수하지만 가난한 학생들을 뽑아서는 러시아 각 도시로 유학까지 보내 중등교육을 받게 했다.
연해주에서의 안중근의 斷指혈서 ‘大韓獨立’
최재형은 독립운동자들에겐 든든한 후원자였다. 1907년 안중근(安重根)이 연해주에 왔을 때는 그를 가까이 맞아들여 함께 독립을 의논했다. 최재형은 안중근의 열렬한 애국의지에 크게 감명 받아, 그의 적극적인 후원자로 나섰다.
최재형은 1908년엔 고종의 헤이그밀사였던 이위종(李瑋鐘) 등과 동의회(同義會)라는 독립운동단체를 만들었다. 동의회는 독립군의 국내진격을 목적으로 하는 무장투쟁조직이었다. 600여명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책임자인 총장엔 최재형, 부총장엔 간도(間島)관리사를 지내 명성이 높았던 이범윤(李範允), 회장은 이위종, 부회장은 엄인섭(嚴仁燮)이 선출됐다. 안중근 등 발기인들은 모두 평의원이 됐다. 동지회 운영자금의 상당부분은 재력가 최재형과 명문가 이위종이 부담했다.
최재형은 독립군 부대에 자금을 대고 무기를 구입하고 군량미와 장비까지 마련해 주었다. 1908년 독립군 최초의 국내진입작전엔 동의회 소속 의병 600명이 동원됐다. 이때 안중근은 50명씩으로 구성된 4개 소대를 지휘했다. 공격노선은 가까운 함경북도 방면이었다. 그 후에도 독립군부대들이 여러 차례 국내진격을 벌였으나, 정보를 미리 입수했던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모두 실패로 끝났다.
적을 눈앞에 두고도 노선분열 계속
대일무력투쟁을 주장하는 급진과격파들이 만주의 간도와 연해주에 머물러 있었지만, 독립군의 국내진격이 실패하자, 노선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일어났다.
온건파는 무력투쟁을 중지하고, 인재육성 국민교육 문화활동과 독립 후를 대비한 준비에 충실해야 된다는 계몽론(啓蒙論)을 폈다. 그러나 강경파는 전쟁의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면서, 광복이 이뤄질 때까지 일본군에 대한 군사공격을 끊임없이 계속해야 한다는 무투론(武鬪論)을 주장했다.
계몽론과 무투론의 논의 결과, 무력투쟁을 고집해온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두 파로 갈렸다. 최재형은 계몽파, 안중근은 무투파였다.
계몽파가 된 최재형은 1909년에는 신문사 대동공보(大東公報)를 세워, 조선어 신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돌렸다. 기사 내용은 주로 조국에서 벌어지는 소식들이었지만, 사설과 칼럼에서는 일본의 잔학성과 조선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들이었다.
연해주 독립운동을 지휘해오면서 무력투쟁을 강조해온 좌파독립운동가 이동휘(李東輝·1872~1935)도 계몽파로 돌아, 김구(金九)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基鐸)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만들어, 학교교육 등 점진적인 문화계몽 운동에 노력했다.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만들어 강경파인 당내 이르쿠츠크파에 대립하면서, 임시정부와 합류하여 임정의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도 역임했다.
고종퇴위 이후 일본의 강압행위가 강화되자, 안중근을 중심으로 한 무투파 동의회원 12명은 투쟁을 더욱 적극화했다. 그들은 1909년 유혈투쟁을 계속하기로 선서식을 갖고, 왼손의 약손가락(無名指·엄지에서 4번째)을 잘라 한자로 ‘大韓獨立’ 네 글자를 혈서로 썼다. 이 유혈결사가 안중근의 단지동의회(斷指同義會)다.
김정일이 태어난 곳은 연해주의 소련군 장교숙소
3·1운동 직후인 1920년 독립군부대장 홍범도(洪範圖·1868~1943)의 만주 봉오동(鳳梧洞)전투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120명을 살해했고, 김좌진(金佐鎭·1889~1930)의 2개 대대는 만주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 3,300명을 사상케 했다.
패전을 거듭한 일본은 5만명을 만주와 연해주에 투입하여 독립군 소탕전에 나섰다. 그때 우리 독립군들은 만주 북쪽과 연해주로 물러섰다. 김일성(金日成·金成株)은 그때 만주에서 러시아로 피신하여, 소련군 장교로 편입돼 소련군 88여단에 편입됐다. 부대 공식명칭은 ‘소련원동방면군 제88보병여단’이지만, 보통은 ‘8641보병특별여단’이라는 특수부대다.
88여단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북쪽, 우스리스크 남쪽의 야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장교숙소는 부대 앞 도로가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이었다. 김일성의 숙소는 동쪽 끝의 2층 방이었다. 지금 그 집은 비어있고, 빈 방에선 검정색 고양이 한 마리가 내다보고 있었다.
김정일이 태어난 곳은 바로 소련군 장교숙소의 김일성 방이었다. 이는 이곳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증언하여 명백한 사실로 기록돼 있다.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 그곳에 기념물을 지어놓고, ‘백두혈통’ 운운하는 것과는 다르다.
내분으로 빚어진 ‘자유시참변’ : 독립운동사의 비극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海蔘威)와 시베리아의 치타(Chita) 사이에 있는 알렉세이요스크를 한국인들은 ‘자유시’(自由市)라고 불렀다. 그 지역이름 시오보드니(Syobodnyy)가 자유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선 흑하(黑河)라고 불렀다.
이 자유시에서 독립군의 친소좌파와 중립우파들은 군사지휘권을 놓고 서로 다퉜다. 이 권력싸움에 소련군이 개입하여, 다수의 우리 독립군이 사망하거나 생포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자유시참변’이다.
친소좌파의 지도자는 오하묵(吳夏黙)이었다. 그는 러시아로 귀화하여 볼셰비키당(Bolsheviki P.)에 가입한 조선계로 ‘자유대대’ 부대장이었다. 자유대대는 과격 고려공산당인 이르쿠츠크파에 속한 독립군이다.
중립우파의 지도자는 역시 러시아에 귀화한 조선인 박일리아다. 그는 독립군인 사할린의용대 대장으로 있으면서 일본군을 공격했다가 반격에 밀려 연해주로 온 ‘니항부대’(尼港部隊·Nihong부대) 부대장이었다. 니항부대는 이동휘의 고려공산당 온건파인 상해파에 속했다.
오하묵은 일본군에 쫓기는 만주와 연해주의 조선독립군 지휘권을 잡기위해, 소련군과 짜고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을 자유시에 모이도록 지시했다. 대부분의 독립군 부대들이 자유시에 모였다. 만주에 있던 김좌진 이청천 홍범도도 부대를 이끌고 자유시로 갔다.
오하묵의 야심을 전해들은 박일리아는 이를 저지하려 했다. 오하묵이 소련군에 요청하여 박일리아에게 니항부대의 무장해제를 명령케 했다. 박일리아가 거부하자 소련군이 니항부대를 포위하여 집중사격을 벌여, 사망자와 부상자가 1,000여명에 달했다.
이 참변은 친러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승리, 이동휘의 온건파와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패배로 끝나고, 군권은 친소파 오하묵에게 넘어갔다. 그 후 독립군의 활동은 약화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