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5년 8월 하순, 하바로브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 극동군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 앞으로 스탈린의 긴급지령이 도착했다. 북한을 소련의 지시대로 주도할 한국인 지도자를 지금 선발하여 보고 하라는 내용이었다. 총사령부는 국가보안인민위원부의 극동지부와 협의하여 극동군 88특별여단 소속의 김일성(당시 본명은 김성주) 대위를 추천했다. 조선공산당운동의 역사와 현상에 대해서는 어둡고 조선인 공산주의 지도자들과도 면식은 없지만 잘 훈련된 소련 극동군장교로서 그가 최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스탈린은 즉각 김일성을 면접하고 싶으니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김일성은 군용기에 탑승하여 스탈린의 별장으로 직행했다. 스탈린과의 면접은 식사시간을 포함하여 4시간 이어졌다.
스탈린은 면접 결과에 대해 만족해하며 김일성을 보내는 동시에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극비지령을 보냈다. “김일성은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즉각 북한으로 보내라. 소련 극동군은 그를 전면적으로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 고위 정치장교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장차 북한을 이끌고 갈 지도자를 낙점하지 못해 연일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다. 따라서 이들은 직감대로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우선 조선의 인민들로부터 절대적 추앙을 받고 있던 조만식(曺晩植·62세)을 막연하게 최고지도자 후보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사령부 지도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조만식이 광범한 인민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평양에 있는 사령부가 조만식과 깊은 대화를 하고 있다는 정보가 첩보국을 통해 모스크바 최고사령관에게 알려졌고 즉시 모스크바 사령부로부터 “조만식과는 적당한 선을 유지하고 활용하라”는 질책 섞인 지령을 받았다.
당시를 회상하여 제25군 군사위원이었던 레베데프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모스크바로부터 지령이 떨어졌다. ‘며칠 후 수송선편으로 원산에 조선인 부대가 도착할 것이니 그들을 열차편으로 안전하게 평양으로 수송하라’는 내용이었다. 9월22일(1945년) 경으로 기억된다. 그 후 소련군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약간 서투른 소련말로 자신이 김일성(당시는 김성주라고 했을 것임)이고 88정찰 여단에 근무하고 있었다고 신고했다. 그는 이어 88여단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만(韓滿) 국경지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었다고 말했다. 순간 이 장교가 모스크바에서 낙점한 지도자 후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그의 본명이 김성주(金聖柱)였고 만주지방에서 항일 빨치산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로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운동에 공을 세운 ‘김일성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두뇌회전이 빠른 정치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은 바로 여기서 미래의 수령 만들기 작전을 찾아야 한다고 지도부에 건의했다. 이 아이디어는 핵심지도부를 놀라게 했다. 훗날 북조선 건설의 총지휘자 스티코프 장군도 이 아이디어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붉은 군대는 김성주 대위를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만드는 이 작업의 총책임자는 스티코프 중장이었고 그의 지휘 아래 제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 특수선동부장 코브젠코 중좌, 로마넨코 민정담당 육군 소장, 그의 정치담당 보좌관 이그나치예프 대좌, 첩보국 책임자 아노힌 육군소장, 극동사령부 7호 정치국 정치담당관 메크레르 중좌 등이 특명을 수행했다.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1994년 중앙일보 김국후 기자가 모스크바의 레베데프의 집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그는 말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소련 군정이 주관했던 조선신문과 라디오평양 등 선전매체를 동원했고 소련학자 박일(朴一)을 김일성대학 부총장으로 앉혀 김일성에게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가르치도록 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고 한반도에 민주기지를 창설하라는 특명수행을 위해 때로는 거칠게 양심의 가책도 없이 철면피하게 거의 무에서 지도자 김일성 장군을 창조해 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조선에는 김일성보다 몇 배 훌륭한 지도자 후보가 많았다. 고집쟁이 영감 조만식이 그렇고 공산주의 이론가 박헌영, 이강국, 김두봉 등도 위대한 지도자 후보로 손색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현재 인간적으로는 조만식에게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박헌영에게는 같은 공산주의자면서도 의리를 배신했던 점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레베데프는 당시 그의 역할에 대해 결과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듯한 말을 했다.
당시 조선공산당을 주도하던 박헌영은 대담하게도 김일성과 소련점령군의 한반도정책을 비판하는 서신을 소련의 국가보안성 극동지부에 보냈다. 그것은 김일성과 소련점령군이 국내파 공산주의자를 배격하고 김일성 빨치산부대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공산주의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스탈린은 이 보고를 받고 박헌영의 비판에는 긍정할 만한 점도 있다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46년 7월초, 김일성과 박헌영 두 사람을 모스크바로 불렀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한반도 전반적인 정세, 남한의 정세, 북한의 정세 등에 상세하게 질문했다. 두 사람의 대답이 끝나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는 이것 저것 지시를 하고 박헌영에게는 남한의 어려운 상황에서 투쟁하는데 고생이 많았다고 위로했다. 스티코프와 로마넨코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의 최고지도자로서 최종적으로 재가한 것으로 생각했다. 결정적인 시점에서 스탈린은 다시 한 번 김일성을 확실하게 지원한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동지들을 소집했다. 모두 자리에 앉은 뒤 박헌영은 다시 쓸쓸하게 미소지으며 그들을 한 사람씩 둘러 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뒤 비장하게 말을 꺼냈다. 최근에 소련에 다녀온 얘기였다. 스탈린 대원수를 만났다. 이는 동지들만 알고 있으라고 했다.
모두가 긴장했다. 박헌영은 “스탈린 동지가 김일성 동지의 북조선인민위원회 활동과 남조선 혁명가들의 혁명투쟁을 둘 다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잠시 말을 끊었던 박헌영이 긴 한숨을 쉬며 침울하게 덧붙였다. “소련군이 김일성 동지를 적극 후원하고 있소. 앞으로 조직사업이나 선전사업 등 당 활동의 모든 부문에서 만에 하나라도 김일성 동지를 자극하지 말기를 바라오.”
참석자 모두가 충격을 받아 한동안 무서우리만큼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도대체 누가 누구 마음대로 조선혁명의 최고지도자를 결정하는가?”하며 모두들 분노에 휩싸였다. 참석자를 대표하듯 김삼룡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조선혁명을 일궈갈 주체는 바로 우리 조선 인민입니다. 조선인민 만이 당의 영도자를 선출할 수 있습니다.”
박헌영은 눈을 감은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박갑동의 회상이다.
BBC방송의 존 스위니 기자는 2013년 3월 런던정경대(LSE) 박사과정 학생으로 신분을 속이고 북한에 다녀왔다. 그는 북한을 여행하고 온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20여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면서 약 90개국에 가볼 기회가 있었다. 24개국은 독재국이었고, 그중 10개 나라에는 몰래 잠입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내가 가본 곳 중에서 가장 이상하고, 괴상하고, 딱하고, 미친 나라였다. 차우셰스쿠 통치 때의 루마니아, 후세인의 이라크, 카다피 치하의 리비아, 무가베 정권의 짐바브웨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최악의 나라였다”
1991년 11월 이명박 대통령이 현대건설 회장 시절, 일곱 번째 소련 방문 때였다. 이명박 회장을 만난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당시에는 북한의 공업이 더 발달하고 국민소득도 높았습니다. 남한은 겨우 농업에 의존하는 수준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북한이 남한보다 가난합니다. 왜 그렇게 됐는지 아십니까?”
“북한은 공산주의를 채택했고 남한은 자본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사회주의를 선택하도록 종용한 것은 소련입니다. 따라서 북한의 문제는 소련의 책임이 큽니다”
50년 전 소련의 스탈린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북한에 ‘김씨 왕국’을 만들도록 한 것에 대한 반성과 자책이 고르바초프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