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같은 시냇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심지어 태양도 변한다. 어제 뜬 태양과 오늘 아침에 뜬 태양이 다르다. 왜냐면 태양표면에 코로나(Corona)가 계속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단 말인가?
인류의 멸망, 지구의 멸망을 예언한 천재과학자 뉴튼(Newton)에 의하면 그 변하는 것 들 때문에 인류는 또는 지구는 지탱할 수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자연환경파괴
화산폭발과 지진
남·북극의 빙산이 녹아 내리는 현상
행성과 지구의 충돌
전염병
전쟁 및 핵무기
식량고갈
위에 열거한 것들이 지구 멸망에 원인이 된다고 많은 미래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것이 무엇인가? 모두가 100년 전, 심지어 50년 전에 모습과 달리 변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려하고 걱정하는 것 중에 대부분은 그러나, 앞으로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이다. 당장 10년 이내로 큰 변(變)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로봇(Robot)의 경우는 심각하다. 1984년 일본 동경에서 ‘세계 로봇 박람회’가 열렸었다. 그 당시 6살짜리의 지능을 가진 로봇이 등장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었다. 이 로봇은 냉장고 문을 열고 오렌지 주스를 꺼내오는 등의 행동으로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 후로 만 20년, 로봇 연구는 잠자고 있었을까? 천만에! 어쩌면 앞으로 짧게는 5~6년, 길게는 10년 이내로 IQ100이 넘는 로봇이 만들어 질 것이 분명하다.
이 로봇들이 인간을 지배하게 될 날이 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가슴뿐일 것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인간은 변한다. 생각도 변하고, 머리도 변한다. 그러나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가슴이다.
그 가슴을 차갑게 하느냐, 뜨겁게 하느냐, 아니면 열린 가슴이냐, 닫힌 가슴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가슴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가슴을 뜨겁게 하거나 또는 닫힌 가슴을 열어놓는 것을 문화적인 사고로 접근해보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지론이다. 가슴이란 문화의 고향이고, 문화란 가슴을 열어주는 중요한 모티브인 것이다.
18세기 후기, 같은 시대에 살았던 연암 박지원(朴趾遠·1737~1805)과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주장했던 이론을 그냥 묵과할 수 없다. 소용돌이를 예상하고 나라가 마치 폭풍전야 속에 있을 듯한 그 무렵에 이 두 학자들은 이 나라 문화의 정체성을 걱정해왔음이 역력하다. 우선 연암 박지원이 임금께 바친 상소문에서 발췌한 것을 소개한다.
“옛날에 민(民)이라고 한 것은 네가지로서, 사(士) 농(農) 공(工) 상(商)입니다. 사(선비)의 일은 물론이거니와 농·공·상의 일도 그 시초는 성인(聖人)의 이목(耳目)과 심사(心思)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대로 전습된 것에는 그 학설이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중략) 그러나 선비의 학문은 실제로 농·공·상을 아울러 포함하고 있는 만큼, 삼자의 일은 반드시 모두 선비를 기다린 뒤에 이뤄집니다. 이른바 농사를 밝히고, 상품을 통하게 하고, 공인에게 슬기를 주는 이는 선비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신하인 제가 짐짓 생각해보니, 후세에 농·공·상이 일을 잘못하는 것은 바로 선비에게 실학이 없는 허물 때문입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박학(博學)을 해야한다. 그를 무시하는 것은 속유(俗儒)일 뿐이다.”
위와 같이 연암이 갈파한 ‘실학’과 다산이 주장한 ‘박학’은 오늘날 어떤것일까? 이 두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시대상에 비춰볼 때 놀랄 만큼 파격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그 당시에도 우리사회에 변화가 있지 않고서는 발전하기 어렵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문화라는 큰 틀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士)는 무엇인가? 반드시 학자(Scholar)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이다. 문화가 오직 이 사람들에게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다양성을 생각하라고 지적한 것이 실학(實學)이고 박학(博學)인 것 일 것이다.
농(農)은 생활문화의 기본이 되는 농사일(Agriculture)이고, 공(工)은 제조 또는 지식 정보화 사업의 틀(Manufacture)이며, 상(商)은 유통(Commerce)을 말하는 것이다.
연암은 농·공·상에게 허물이 있으면, 그들을 감독하고 이끌어 가야 할 선비에게 잘못이 있다고 선비의 책임을 들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주장은 오늘날 처해있는 상황과 매우 유사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선비의 책임감이란 오늘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 각층 지도자들이 무겁게 짊어져야 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바로 그 나라 문화의 척도와도 같은 것이라서 더욱 중요한 것이다.
‘문화가 말한다.’(註)라는 책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1960년대 한국(South Korea)과 아프리카 가나(Ghana)의 경제적인 데이터를 조사해 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 두 나라가 어쩌면 그렇게 같은 입장이었는지를 보고 놀랐다. 두 나라는 일인당 국민소득, 기초경제규모, 제조공장의 형편 등등이 거의 같은 수준에 있었다.
그리고 한국과 가나는 같은 수준으로 외국의 경제 원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후 한국은 세계에서 14번째로 큰 경제대국(註:2000년 통계임. 2005년에는 12번째)이 되어있다. 그리고 가나는 아직도 한국의 15분의 1밖에 안되는 일인당 국민소득을 올리고 있다. 어째서 이런 큰 차이가 생긴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서 ‘문화가 말해준다’고 나는 믿는다. (Samuel P. Hunting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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