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재앙을 불러 왔다. 다시는 이런 야만적인 전쟁은 없어야 한다. 그래서 이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아야하고 또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날의 악몽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내 고향은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 아버지는 8∙15 광복 후 35세 때부터 고향에서 오랫동안 면장을 지내셨고 나는 이곳에서 2대 독자로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런데 6∙25 공산군 남침이 우리 집안을 산산 조각으로 만들고 말았다. 내가 서울에서 중학교 1학년에 재학중일 때였다.
서울이 공산군에게 점령 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왔고 아버지는 마을 앞산으로 피신하셨다가 9∙28 수복 후에야 돌아오셨다.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했고 급기야 평양을 점령한 후 압록강으로 진격했다. 이제는 그야말로 ‘북진통일’이 되는가 했다. 이런 꿈은 중공군이 뛰어들며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 소위 ‘인해전술’로 물밀듯이 몰려 왔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후퇴를 하기 시작했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우리 가족에게 비극이 닥친 것은 1∙4 후퇴 때 피난길에 나서면서 부터였다. 당시 우리 가족은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고모님과 우리 4남매, 또 우리 집에 피난 와 계시던 진외가 식구 등 모두 13명이었다.
우리는 경찰관으로부터 “동두천이 터졌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집을 떠난 뒤 장흥과 안양, 그리고 수원을 지나 4일 만에 용인시 수지읍 풍덕천리 ‘대지마을’에 이르렀다.
피난길은 발목까지 눈이 쌓였고 강추위로 강물이 꽁꽁 얼어붙어 마차와 소를 끌고 한강을 건넜고 길거리는 온통 피난민들과 후퇴하는 미군 차량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대지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니 이상하리 만큼 밖이 조용했다. 밤새도록 천지를 뒤흔들던 포성도 멈추고 큰 길을 꽉 메웠던 미군 차량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더니 동이 트자 남쪽으로 내려가던 피난민 행렬이 거꾸로 올라오고 있었다. “웬 일이냐”고 했더니 밤사이에 중공군이 ‘오산’까지 밀고 왔다는 얘기 였다.
그러니까 중공군에 포위된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시는 것 같았다.
중공군은 어둠이 들 무렵 마을로 들이 닥쳤다. 흰 두루마기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마차를 끌고 있었다. 무기라고는 소총과 권총, 그리고 방망이 수류탄이 전부였다. 대포 등 중무기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군대에 왜 밀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은 중공군들이 떠드는 소리만 들릴 뿐 총소리 하나 없이 장막이 흘렀다.
이러더니 며칠이 지났을까. 아침나절 갑자기 남쪽에서 무스탕 비행기 편대가 날아 오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우리 비행기가 왔다”며 모두 집 밖으로 뛰어나와 비행기를 반겼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비행기는 지붕 위를 날듯이 저공비행을 하며 사정없이 기관총을 쏘아 댔다. 이렇게 몇 바퀴를 돌고 떠나자 마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됐다.
온 마을은 불바다가 됐고 여기저기서 식구들을 찾느라 울부짖고 있었다. 처참하게 죽은 피난민 시체들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중공군은 공습을 받자마자 산 속으로 숨어들어 몇 명이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날부터 이 마을은 미7사단과 중공군이 싸우는 전쟁터로 바뀌었다. 매일 비행기 폭격과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고 애꿎게 수많은 피난민들만 여기저기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이런 상황은 며칠간 지속됐다. 이곳에서 피난민들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아직까지 파악 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께서는 “여기서 죽느니 차라리 죽든 살든 남쪽으로 가자” 시며 피난 봇짐을 지고 나서셨다. 마을 어귀를 지나 ‘풍덕천리’ 4거리에 있던 ‘양조장’ 앞에 이르자 피난민들이 몰려 있다가 너도 나도 따라 나섰다. 일행은 20여명으로 늘어났다.
마침 얼어붙은 ‘풍덕천’을 건너려는데 남쪽 하늘에서 ‘세이버’ 전투기 편대가 날아 오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가던 길을 멈추고 길 복판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피난민이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모두 피난 봇짐을 머리 위에 얹었다. 그랬는데도 비행기 편대 4대 중 3대는 서울 쪽으로 날아 가고 한 대가 되돌아오더니 우리를 향해 거꾸로 솟았다. 비행기 앞은 마치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기관총을 쏘는 것이 그렇게 보인 것이다.
“저것보라”고 소리치며 엎드리는 순간 비행기는 “따따따--” 기관총을 퍼붙고 다시 하늘로 치솟아 다른 비행기를 따라 서울 쪽으로 날아 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까 아버지등 우리가족과 피난민들이 모두 피투성이가 돼 쓰러져 있었다. 아버지는 총을 맞으신 후 벌떡 일어서시더니 힘없이 쓰러지셨고 여기저기서 “살려 달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일행 20여명 중 산사람은 나와 누나, 그리고 두 여동생 뿐 이었다.
그나마 누나와 두 여동생은 모두 팔다리에 파편을 맞아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졸지에 전쟁고아가 됐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 할 수도 없었고 누구하나 도와주려는 사람조차 없었다. 너도 나도 총탄을 피해 살려고 뛰는 마당이니 정말 겨울 강추위 이상으로 세상이 냉혹했다.
그때 돌아가신 아버지 연세는 40세이셨고 살아난 누나는 15세, 나는 14살이었으며 두 여동생은 9살과 7살이었다. 누나는 발에 맞은 총상 후유증으로 얼마 뒤 사망했다.
결국 나는 두 여동생을 거느린 ‘소년가장’으로 세파를 이겨내야 했다. 나는 양담배를 목판에 담아 목에 걸고 “담배사세요” 라고 소리치며 고향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내가 서울로 상경한 것은 1954년 봄이었다. 17살 때다. 피난길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다가 서울서 고학을 하기로 결심하고 두 여동생을 이끌고 무작정 상경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단이라기보다는 세상을 모르는 무모함이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어떻든 나는 덕수중학교 3학년에 복학을 한 다음 우선 학비를 마련하려고 미아리에 있던 ‘스탬프‘공장 공원으로 취직을 했다.
이 공장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빈 ‘캔’을 망치로 편 다음 ‘스탬프’를 찍어내고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망치질과 ‘프레스’를 돌리며 그야말로 ‘주경야독’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국일보 창간과 동시에 신문배달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후 일관되게 ‘신문인생’ 60년을 이어왔다..
6∙25전쟁은 끔찍했다. 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 사상자는 물론 민간인 사상자는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또 수많은 어린이들이 부모를 잃었고 1천만 이산가족이 여태껏 고통을 겪고 있다.
이 밖에 엄청난 물적 손실을 가져왔다. 남북 양쪽 민가와 학교, 병원, 공장, 도로, 교량, 교회와 사찰 등이 무수히 파괴 됐다.
그런데도 그때 그 참혹했던 실상은 우리 뇌리에서 까맣게 잊어가고 있다. 다시는 이런 야만적인 전쟁은 없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