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언 42년 전의 일이다. 유신의 찬 바람이 심하게 불던 1974년 1월 합동통신 국방부 출입 유홍구 기자가 보안사에 끌려갔다. 처음에는 겁주 기가 아닌가 했으나 하룻밤이 지나고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때 사회부에서 법조를 맡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서울지검 공안부로 갔다. 정명래 부장검사에게 유기자 연행사건을 얘기했더니 “어? 벌써 (영장이) 떨어졌는데…” 하는 것이었다. 군사 기밀보호법위반 구속 언론인 제1호가 된 것이다. 영장에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에다 절도죄까지 추가되어 있었다. 병무청 자료를 슬쩍했다는 것이다. 기사내용이라야 신체검사 대상자가 몇 명이라는 등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10월 유신 때 비상국무회의에서 만들어진 군기보호법은 안보상 위해행위를 철저히 막는다는 명분이었지만 언론의 입장에서 보자면 군관계 취재를 철저히 봉쇄하고 발표 외에는 쓰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언론계에서 첫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는 말들이 나왔는데 하필 내 옆에 앉은 동료가 첫 희생자로 걸려든 것이다. 회사에 비상이 걸렸다. 유승범 편 집국장 등 회사 간부들과 함께 김치열 검찰총장을 찾아갔다. 김 총장은 사건내용을 경청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정도라면…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고 의외로 시원한 답변을 주었다. 우리 일행은 좋아하며 돌아 왔는데 다음 날 그런 기대는 완전히 깨졌다. 김 총장은 출근하자마자 아침 일찍이 유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잘 못 파악한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기소장이 법원 에 도착하던 날, 서둘러 유태흥 법원장(전 대법원장)을 찾아갔다. 그는 반
쯤 눈을 감은 채 내 설명을 경청하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가 말이야, 도와줄 것은 배당밖에 없 는데…” 빨리 이름을 대라는 눈치다. 기자실로 올라와 베테랑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황주명 판사가 좋다는 것이었다. 황 판사는 이 사건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권총을 찬 보안사 요원이 판사 방에 들어와 꼭 실형을 때려달라고 사정하는 일도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황 판사의 기가 죽을까 봐 그의 방에 들락거렸는데 차마 긴말은 하지 못 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쓴 웃음을 짓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황 판사의 결단으로 유 기자는 74년 3월13일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2개월 만에 석방됐다. 그해 연초부터 2개월 간 실형이나 집행유예냐, 보안사의 자존심이냐, 합동통신 나아가 언론계의 자존심이냐를 놓고 씨름을 벌였다. 법조 기자단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이런 소동이 있은 지 3년 후 황 판사는 법원을 떠났고 그후 양심적인 법조인으로 법조계를 리드한다는 평을 들었다. 연합통신 상무로 퇴직한 유홍구 기자는 그 건장하던 체구에도 불구하고 3년 전 73세로 별세 했다. 사건 당시, 기사자료 유출과 관련하여 병무청 공보관실 직원 정종락씨도 구속기소되어 집행유예로 석방됐는데 그는 그후 합동통신에 특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