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한언론인회 회원이 된 지도 10년이 지났다. 회원이 되기까지만 해도 대한언론인회는 나와는 거리가 먼 , 몇 몇 선배들만의 친목단체 정도로 여겨졌다. 그래서 아예 문을 두드려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일간지 취재기자로 뛰고 있을 때부터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 사회적 큰 이슈가 있을 때마다 성명서 등을 통해 나온 바른 소리를 일간지에서 보면서 언론의 뿌리를 느끼게 되었으며 은퇴 언론인들의 기개(氣槪)에 박수를 보내곤 했다. 그러면서 세월이 많이 흘렀다. 오랜 일간지 기자생활에서 정년퇴직 한 후 다시 월간 대한뉴스 논설주간으로, 취재 하고 글 쓰고 있을 무렵이다. 우연한 기회에 대한언론인회 회원인 선배 한 분을 만났다. 그 선배로부터 언론인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회원가입 절차 등을 알게 되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회원 가입신청을 하고 얼마 후 입회결정 통고를 받았다. 그때부터 매월 받는 회보를 통해 그동안 끊겼던 선후배의 소식과 각 언론 단체 신문사 동정 등을 알 수 있었다. 모두 우리들의 이야기, 대화가 통하는 글, 심지어는 회원 가족 자녀들 소식까지 자세히 전해주고 있으니 이 어찌 반가운 신문이 아니겠는가!. 어느 듯 대한언론인회보는 가장 기다려지는 신문이 되었다. 그리고 ‘송년의 밤’ 등 크고 작은 행사 또한 참석할 때마다 뜻있고 흐믓 한 ‘만남의 장’으로 긍지를 갖는다.
나는 습관적으로 회원이 아닌 은퇴 언론인들과 만날 때도 대한언론인회를 화두에 등장 시킨다. 대한언론인회의 움직임 등은 모두가 바로 그들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달에 한두번 만나는 날에는 반드시 소식(언론인 회보 등)을 안고 간다. “야! 이 친구 (이혜복 회장) KBS 아나운서 출신 아닌가---“이 양반(신우식 회장) 은 김천 과수원 집 아들인데-- 서울신문 사장도 하고--” 식당, 다방 안은 만날때마다 시끄럽다. 회보에 실린 ‘논평을 논할 때도 있는데 서로의 의견이 대립될 적엔 일촉즉발의 위기(?) 가 느껴지기도 한다.
1997년 4월 1일자 창립 20돌 회보 ‘미니 회고록’에 내가 쓴 “도사 구속이여” 호외요“ 기사 이야기도 나왔다. 나도 그 당시의 취재 무용담을 털어 놓으며 맞장구를 쳤다. 오래 전 지방 출장 때의 일이다. 환담 끝에 서울 소식을 묻는 친구 들에게 회보를 보여 주었다. ‘KBS테러 위협에 분노‘ 라는 대한언론인회 성명서를 보고 난 이들은 아 ! 오빠루(오판용 회우의 애칭) 글 썼다. 라며 그가 쓴 ’영남일보의 석간 복귀‘ 기사를 읽다말고 취재시절 에피소드를 마구 쏟아냈다. 배꼽을 쥐며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지면서 한참동안 그 때 그 사건을 회상했다. 대한언론인회는 이렇게 내 생활의 가교역할을 잘 해주고 있다. 그래서 내가 언제나 기댈 수 있는 영원한 언덕이고 내 고향 구들 목 같은 곳이라 여기고 있다.
력단련 문화역사 탐방ll
제 1절 야유회 체력단련
1. 추진 경위
대한언론인회가 출범한 후 역대회장들은 한결 같이 회원들의 후생복지 문제를 우선 과제로 주창했다. 본회의 창립정신이 회원간의 친목과 언론 발전에 기여하는데 있으니 만큼 이것이 곧 본회의 창립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당위성 때문이다. 따라서 환경 캠페인과 봉사 활동, 체력단련행사 역사문화탐방, 해외시찰, 산악 동호인 활동 등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그러나 한정된 공익자금의 과실에 운영자금의 태반을 의존 하고 있는 본회의 실정으로는 금융금리의 변동에 따라서 회원들의 후생복지 문제도 명암이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본회의 법인체 등록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던 1986년 9월 16일 임의 단체 형식에서 벗어나려고 몸 불리기에 나선 4 .7 언론인회는 제94차 운영위원회를 열고 ‘가을 야유회 개최의 건’과 ‘월례관광행사의 건‘을 결의했다. 본회 창립 9년만의 일이
다. 그 전에도 1984년과 1985년에 서울 근교의 야유회가 있긴 했으나 회원들의 복지증진을 위한 문화행사의 길이 본회 규약에 의하여 처음으로 트이게 된 것이다.
공식화된 본회 야유회는 그로부터 10일 후인 1986년 10월 26일 수락산 초입 덕성여대 생활관 광장에서 열렸다. 제2대 김광섭 회장, 동홍석 사무국장 때의 첫 단체 나 들이었다.
이날 모인 회우들은 40여명, 모두 회 세의 신장을 다짐하며 우의를 다졌다. 이 날을 기점으로 본회의 야유회는 해마다 명칭도 ‘야유회’에서 ‘체력단련‘ ’문화 역사탐방‘으로 차원을 달리했다.
본회는 그동안 50여 회에 걸친 이 연례행사와 6회에 걸친 해외연구시찰, 2회의 금강산 답사를 통해 체력을 단련하고 견문지식을 넓혔다.. 특히 1993년 11월 17명의 회우들은 해외 연구시찰단을 편성 북미주, 동구, 지구촌 순회, 1996년 7월 1일 25명이 참가한 백두산 등정, 2001년 3월 고령회우 20명이 참가한 금강산 선상포럼 등은 특기할만한 이벤트로 본회는 이때부터 도약의 중흥 기에 들어 선 것이다.
체력단련 행사는 회원들의 체력과 심신의 건강을 향상 시켜 보다 나은 노년의 건강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다. 그러므로 야외에 나가 되도록 걷는 하이킹에 주안을 두고 당일로 행사를 마치도록 했다. 빛과 그림자로 얼룩진 지난 30년의 역정을 각 분야의 상황별로 살펴본다.
2. 주요행사
*융릉, 건릉을 살펴본 봄철 체력단련 행사
90명의 회우들이 참가한 2000년 5월 23일 첫 봄철 체력단련 행사에서는 화성의 융릉과 건릉을 살펴보았다.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융릉은 장조(사도세자 추존)의 능이며, 건릉은조선조 22대 정조(사도세자의 아들)의 능이다.
또한 신라 시대의 우아한 7층 사리 석탑과 국보 120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0종이 있는 용주사도 둘러 보았다. 한편, 썰물 때를 이용하여 제부도로 건너가 해물을 곁들인 즐거운 회식도 있었다.
*국립 수목원에서의 가을철 체력단련 행사
2000년 9월 21일 공기 맑고 수목이 울창한 경기도 포천에 있는 국립 수목원 일대에서 가을철 체력단련 행사를 가졌다. 80여명의 회우가 참가한 이 가을철 행사에서는 약 한 시간 동안에 걸쳐 산림박물관을 견학한 다음 5백 헥타르의 산림욕장에서 한 시간이 넘는 산림욕으로 심신을 단련 시켰다. 2킬로 이상의 하이킹 코스를 왕복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계곡 입구에 자리한 흥룡사에 들러 주지 스님으로부터 흥룡사의 건립 내력과 인근 산야의 지형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귀로에는 이동에 들러 이름이 널리 퍼진 '이동 갈비' 와 '포천 막걸리'의 맛도 보았다. 이어 세조의 능인 광릉을 둘러보고 봉선사에 들러 5백여 년 전 이 절 창건 당시에 제조된 커다란 범종도 살펴보았다.
2000년 9월 19일 90명의 회우들이 참가한 가을 철 체력단련 행사는 포천 백운산의 유명한 백운계곡의 답사로 시작 되었다.
* 서해대교 일대에서 펼친 봄철 체력단련 행사
아산만의 경기도 평택과 충남 당진을 잇는 서해대교가 완공 되자 서해대교는 일약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이에 본회에서도 2001년 4월 20일 서해대교의 관람을 중심으로 한 봄철 체력단련 행사를 그 곳에서 펼치기로 했다. 90명의 회우들이 참여한 이 날 행사에서는 서해대교 관리소장으로부터 서해대교의 공사 시작에서 완공이 될 때까지의 현황을 영상으로 보고 설명을 들었다. 이어 한보철강을 지나 석문 방조제의 위용을 돌아보고 아산만 입구의 장고항구에서 실치회의 별미도 맛보았다.
보람 있는 체력 단련 . 문화역사 탐방
이 선 희
대한언론인회가 30년 역사를 기록하는 동안 어찌 이런 일 저런 일들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부분적으로 생각 해 볼 때 가장 보람 있는 행사라면 봄, 가을 로 실시되는 체력 단련 . 문화 역사 탐방일 것이다. 같은 회사 출신뿐만 아니라 타사 출신 친구들도 함께 만날 수 있어 좋고 오랜만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으니 회원들 모두가 반기는 연례행사라 하겠다.
또 체력 단련 행사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안 빠지고 참석하는 회원이 있는가 하면 입회만 해 놓고 참석하지 않는 회원도 없지 않다. 이럴 때마다 모든 회원들이 빠짐없이 참석해 단합된 모습을 보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한 가지 건의 하고 싶은 것은 회장 선거에 관해서다. 주로 국장급 퇴직자 중에서 회장을 선출해 왔는데 앞으로는 하위직 출신자도 회장후보로 출마 해 당당히 경쟁했으면 한다. 그래야 퇴직자들은 모두 공평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갈 것이다. 회보의 경우도 너무 과거에만 집착하지 말고 좀더 미래지향적인 글을 많이 실었으면 한다. 어쨌든 그동안 회원들에게 체력 단련 문화 역사 탐방을 통해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 고맙게 생각한다. 대한언론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제2절 문화역사 탐방, 해외시찰로 업그래이드
1988년 10월 30일부터 1991년 10월 20일 까지 ‘야유회’ 명칭의 행사는 거의 서울 근교에서 열렸으며 명칭을 ‘체력단련’으로 바꾸어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2000년 9월 21일 포천군 소요산 나들이는 ‘체력단련’으로 바꾸어 실시된다. 그러다 이 체력단련 명칭도 ‘문화역사 탐방 ’으로 업그래이드 되었다 그 첫 케이스가 2001년 10월 16일 1박 2일 로 실시한 공주, 부여 답사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운영위원회가 결의 했던 월례관광 계획안은 무모한 즉흥성만 들어 낸 채 무산되고 말았다.
제12대 회장에 입후보 했던 신 우식 전 회장은 회장 입후보 소견 발표에서 회 우들의 복지 문제에 대해 이런 약속을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회우들의 후생복지입니다. 이 문제에 각별한 신경을 쓰겠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선배님들이 많으십니다. 특히 어른을 모시는 것에 있어서는 여러분 하고 의논을 하겠습니다. " 또 12대 회장의 취임사에서는 "금년에도 정해진 복지 사업을 차질 없이 집행을 하겠습니다. ........문화역사 탐방도 봄, 가을에 걸쳐 두 차례 시행 하겠습니다. 체력단련 행사도 상반기 하반기 두 차례에 걸쳐 시행 하겠습니다." 고 다짐을 하며 회원 복지 문제를 무엇보다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예년과 다를 바 없으나 집행부에서는 1년 에 문화역사 탐방 2회, 체력단련 행사 2회 도합 네 번의 회원들이 한데 어울리는 야외 행사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런 행사는 시행 되었었다. 하지만 이전에는 이 행사의 주관을 집행부에서 하지 않고 본회의 산악회가 담당해서 시행을 했다. 그러나 새 집행부에서는 과거와는 다르게 행사의 격을 높여 시행해 보자는 고민에 싸였다. 그래서 우선 야외에 나가 점심이나 먹고 오는 체력단련 행사나, 아무 뜻도 없이 관광지의 구경에서 끝나는 허울 좋은 문화역사 탐방 행사를 지양하고 우리 회원들의 의식 수준에 알 맞는 의미 있는 행사를 실시해 보기로 하고 그 행사의 격을 높이기로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①회장단 회의에서 행선지를 정하고 ②철저한 사전 답사를 하며(시간 음식, 숙소, 등등) ③안락하고 안심할 수 있는 교통편의 선택 ④행선지의 예비지식을 유인물로 회원들에게 알려 주고 재미있는 일화 등을 설명해 주며 ⑤ 행선지에서는 반듯이 전문가의 해설을 듣기로 하여 지식을 넓히기로 하고 ⑥ 차내에서의 오락성을 높여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더욱 돈독히 하고 ⑦ 행사로 인해 잘 모르고 있었던 부분을 좀 더 알게 함으로써 회원들의 교양에 보탬이 되게 하는 한편 ⑧행사의 주관을 집행부가 담당하며 ⑨ 특히 문화역사 탐방은 하나의 주제를 설정하여 실시하고 ⑩ 국내 관광 회사 수준의 여행을 하도록 한다는 등의 방침을 세웠다.
위와 같은 방침에 따라 집행부에서는 2000년도의 문화역사 탐방과 체력단련 행사 부터 즉각 시행에 옮기기로 했다.
1. 참여도 높은 문화 역사 탐방
본회의 문화 역사 탐방은 사실상 1979년 2월 24일부터 시작됐다. 1박 2일 코스로 이때 찾은 곳이 호남 명찰 백양사 송광사 화엄사였다. 이 첫 나들이에 몇 명이 참가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4. 7 구락부’ 당시 ‘ 4. 7 회보를 프린트 판으로 내다가 첫 활자판으로 바뀐 제 6호 3면 하단에 10명의 회우들이 화엄사 네 사자 탑 앞에 서 있는 것으로 미루어 10여명이 참가 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 역사 탐방은 이해 6월 7일 10여 회우들의 동해안 답사로 이어져 백암온천 성류굴, 연산폭포, 보경사 설악산 등을 찾았다. 이렇게 이어진 본회의 문화 역사 탐방은 문경 관문, 계룡산, 설악산 마이산 강화도 지리산 제주도 보길도 거문도 덕유산 태백 소백 금봉산 주왕산 선운사 백산 황토현 안동 하회마을, 제천의림지 등 전국의 명승 명찰과 역사의 현장 등을 고루 돌면서 30여 차례나 실시 됐다. 그중 주요한 탐방 지를 간추린다.
백산 황토현(黃土峴) 선운사를 보다
1997년 7월 15일 새벽부터 쏟아진 장맛비는 염열을 식히는 데 족했다. 45명의 회우들이 오후 1시 내장산 초입에서 실명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김용학 회우의 마중을 받았다.
내장산 주봉인 신선봉(763미터)을 비롯, 서래봉 까치봉등 아홉 봉우리가 동쪽으로 발굽형을 이루며 골 깊이 형성돼 있다. 가을 철 단풍으로 유명하지만 내장산은 겉보다는 산속으로 들어 갈수록 더 하다고 해서 당초 ‘영은산’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회우들은 상아빛 서래봉을 뒤로 하고 오후 3시께 정읍에서 서 남쪽 1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백산 황토 현에 도착했다. 거의가 초행길이었다.
백산은 나지막 야산(47미터) 으로 그 짙은 황토색은 고창 고부가 묵묵히 이 땅의 역사를 지켜온 백제의 색갈이며 이 고장이 낳은 미완의 혁명가 전봉준의 색갈이다.
전봉준은 백 여 년 전인 갑오년(1898년) 황토마루에서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 걸고 동학농민군의 선봉에 섰었다 황토 마루는 농민 군이 관군을 섬멸시킨 최대의 승전지다.
일행은 광장에 자리한 황토현 전적기념관을 살폈다. 농민혁명 기념탑, 녹두장군 동상, 전적지정화기념비, 유물전시관등 구조물이 많았다. 시대정신과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영웅이 되었다가 기피인물로 나락하기도 했던 미완의 혁명가 전봉준. 뒤늦게나마 농민군의 혁명성이 인정되어 1963년 황토 현에 농민전쟁기념비를, 1987년에는 대대적인 정화 사업으로 기념관 건립을 끝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언저리에 민중의 흔적은 없고 학정을 자행한 위정자들의 흔적만 남아 있으니 아이러니컬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전봉준의 고택은 기념관에서 지척인 이평면 장내리에 있다. 질박한 황토땅위에 세워진 초라한 초가삼칸, 흙담 벽 위에 달랑 걸려있는 초상화와 고서첩 몇 권, 색바랜 도포 한벌이 고작이었다.
일행은 고창의 명찰 선운사에 들렀다. 절집 초입에 자리한 부도 밭에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율사비’ 는 이 절집 최대의 보물이다. 귀로에 절간 어구에 세워진 미당 서정주의 시비가 눈에 띠었다.
남쪽 땅에 자리한 금강산 주암사(朱岩寺)
1997년 9월 24일부터 이틀간 본회 문화 역사 답사 반 25명은 강원 임병돈 회우의 안내로 남한 땅에 유일하게 자락을 깔고 있는 금강산 화암사 일대를 돌아 봤다. 화암사의 위도는 북위 38도 11. 06, 동경 128도 5.18 로 금강산 자락 남쪽 끝,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에 터를 잡고 있다. 물론 휴전 전에는 북한 치하였다.
금강산길이 트이기 전의 일이라 금강산 자락을 밟는 것만으로도 회원들의 감회는 새로웠다. 일행은 첫 날 내설악의 백담사를 거쳐 해발 750미터의 미시령 등 태백 준령을 넘어 분단된 민족의 한이 서린 이곳 까지 온 것이다. 화암사 는 신라 혜공왕(869년) 5년 진표율사가 창건했다. 그 후 이 절은 다섯 번의 화재로 폐허상태 였는데 1991년 점버리 대회 때 국내, 외인 종교의 식장으로 지정되면서 대웅전을 재건하고 요사채를 넓혀 각광을 받고 있다. 낙산 비치호텔에 묵은 일행은 이튿날 낙산사와 의상대 홍련암도 찾았다. 이 중 의상대는 만해 한용운이 낙산사에 머물 때 다시 육각정으로 건립한 정자로 산 바위 바다가 조화를 이룬 관동의 절경이다.
청간정, 경포대도 놓칠 수 없는 관동 팔경중의 진수. 이날 마지막 본 오대산 월정사 의 15층 석탑이 안개 속에 젖어 있었다.
* 윤선도의 족적을 더듬어
'고산 윤선도의 족적을 더듬어' 를 주제로 하여 전남 해남과 보길도 일대에 흩어져 있는 윤선도의 발자취를 따라 가 보는 이틀간에 걸친 말 그대로의 봄철 문화역사 탐방에 들어갔다. 2000년 4월 20일 이 행사에 참여한 80여명의 회우들은 우선 우리나라의 땅 끝인 해남군 송지면 갈 두리를 답사한 뒤 뱃길로 1시간이 걸리는 윤선도의 유배지였던 완도군 보길도로 건너가 버스와 배에 시달렸던 긴 여독을 풀었다. 다음 날은 아침, 지금은 흔적을 찾아 볼 수도 없는 윤선도가 유배되어 살던 용동과 세연정, 세연지, 회수담, 판암보 등이 격조 높게 어울 어 진 우리나라 전통 정원을 둘러보았다. 또, 고산 윤선도가 시가를 짓고 읊으며 책을 읽었다던 부용동 산 중에 자리한 동천석실도 살펴보았다. 해남으로 다시 건너와 돌아오는 길에 윤선도의 생가와 '고산 박물관'도 돌아보고 설명도 들어 이제까지와는 다른 알찬 문화역사 탐방이 되었다.
* 도산서원과, 소수서원 순례
저명 서원의 순례를 주제로 한 가을철 문화역사 탐방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안동의 도산서원과 영주의 소수서원을 살피기로 했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일대는 우리나라 유교 문화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어 살펴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지역이다.
2000년 10월 20일 90명이 참가한 저명 서원 순례의 문화역사 탐방은 도산서원을 가는 길목에서 조령 제1관문 일대에 조성된 TV드라마 '태조 왕건'의 촬영 세트장의 관람부터 시작했다. 이어 전통적인 가옥과 촌락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안동 하회마을을 살펴보고, 서애 유성룡의 유물관을 돌아보며 그의 나라 사랑의 깊은 정신을 되새겨 볼 기회를 가졌다. 안동에서 1박한 회원들은 다음 날 조선조의 대학자인 퇴계 이 황을 모신 도산서원을 둘러보았다. 이 서원에서는 특히 서원관리소장의 서원과 이 황에 관한 전문적 해설이 있었고, 퇴계의 유물을 살펴보았다.
일행은 신라시대에 창건된 부석사에 들러 당간지주, 석등 등 신라시대의 유물을 비롯하여 고려 때 건축으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등의 문화유산을 돌아보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에서는 인근의 빼어난 풍광과 더불어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서원으로서 대원군의 서원 정비 때에도 도산서원과 더불어 정리되지 이러한 서원으로 문화적인 가치가 크고 고색창연한 서원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 명찰 순례 (2001년 5월 22일∼23일)
2000년도의 개혁된 문화역사 탐방 행사는 회원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이로 말미암아 행사 때의 참여 신청이 넘쳐 순서를 기다리다 행사에 참여할 수 없는 서원도 많았고 그들의 불만도 대단했다. 이어서 진행된2001년의 봄철 문화역사 탐방의 주제는 '명찰 순례'로 정하고 구례 화엄사, 광주 송광사, 고창 선운사를 돌아보기로 했다. 2000년 5월 22일 회원 90명은 송광사로 향하는 길목 남원에 들러 광한루 등의 고적을 살펴보고, 지리산을 차원으로 종주한 뒤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인 고찰 화엄사에 도착했다. 곧 이어 사찰의 홍보 담당 스님의 안내로 국보67호로 지정된 불전인 '화엄사 황전', 역시 국보 제12호인 '화엄사 각황전전 석등', 국보 제35호 '화엄사 사사 삼층 탑' 등의 귀중한 문화재를 관람했다. 일행은 송광사가 있는 조계산 중턱에 자리한 조계산장에서 1박한 뒤 다음 날 아침 송광사를 찾아 국보 제56호로 지정된 '송광사 국사전'( 국보인 목조 삼존 불감)과 '경패', '금동 요령'등의 보물을 전남대학 교수의 안내로 살펴보았다. 선운사에서는 보물로 지정된 '금동 보살 좌상' '지장보살' '대웅전'등을 홍보담당 스님으로부터 해설을 들었고 불교의 심오한 강의도 있었다.
노년을 작약(雀躍)케 한 언론인회
유 창 순
내 나이 79세가 어제 같은데 또 한 해가 저물어 가니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과가를 되씹고 싶어진다. 나는 글을 써 생계를 영위 한다는 기자생활을 해왔지만 글을 직접 쓴 것은 소위 말하는 정년 이후부터였다. 이상하다 생각할지 모르나 취재 하고 기사를 써야 할 한창때는 내근만 했기 때문에 직접 글을 쓸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남의 글을 받아 지면에 맞춰 편집 하여 독자들이 읽기 좋게 해주는 편집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일보에서 22년을 근무 하고 물러나서부터는 주간 일간지등에서 기자 겸 부장. 국장을 역임하면서는 취재, 편집, 교열, 사진 촬영 등 팔방미인이 돼야 했다.
누가 ‘여생을 쉬며 즐기랴“ 했던가 싶다. 나는 노 장년(58세-76세)을 1인 4역으로 정녕 바쁘게 지냈다. 76세에 은퇴를 했지만 그래도 일거리가 있었다. 황해도민회, 모 부회장의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요 즘은 어느 기관장의 연설문을 수시로 집필해 주고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배우고 사랑하고 바쁘게 일하는 것”이라는 게 산수(傘壽)를 1년 앞둔 나의 인생관이다. 한국일보에서 정년하고 황해민보에서 일하던 1996년 어느 날 나는 대한언론인회에 가입했다. 헤어진 동직들을 노년에 다시 만나고 회동하고 지방 시찰 등 행사를 하게 된 것은 나를 마냥 작약(雀躍)케 했다.
특히 70세 때는 고희 기념 연까지 베풀어 주니 너무나 큰 보람을 느꼈다. 1998년 8월 어느 날 나는 언론인회보 편집자로부터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에 실을 원고를 청탁 받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글을 써준 적이 있다. 나는 “실향민의 한 ‘대리해소’ 보람”이란 주제에 1인 4역--사명감을 갖고 열정 바쳐“란 부제를 달았다.
그리고 실향민들은 각종 친목모임을 사랑한다. 동향인 끼리 만나면 옛정을 되새기며 간담상조(肝膽相照) 하고 대상적(代償的)으로나마 향수를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민회가 발행하는 황해도민보를 애독한다. 기사 하나 하나가 고향소식이요, 고향의 향기요 대변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황해민보를 위해 취재는 물론 컬럼도 쓰고 편집, 교열, 사진 촬영 등 1인 4역을 해내고 있다“. (이하 생략)
아무튼 나는 흔쾌감 속에서 이글을 썼다. 모두가 정년후의 연장근무 덕분이었다. 여기서 애피소드 하나를 첨언해 둔다. 1984년 한국일보에서 정년을 맞았을 때 나는 “‘정년노인’ 이면서 갈수 없는 경로당“이란 글을 사보에 게재 했었다. ”늙어서 직장을 그만 뒀으면 당연히 경로당에 가서 소일해야 할 텐 데 ‘55세 퇴직자는 노인이 아니다“면서 경로당 이용을 거절 한다’는 요지였다. 이 기사를 본 사람이 나를 불러 ”촉탁으로 더 근문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후 58세까지 더 근무하고 물러나 농수산신문(격월간) 레져 신문(주간) 에서 부장 국장 대리를 역임했고 마지막으로 황해민보에서는 편집국장으로 약 23년간을 근무했다. ” 사람이 산다는 것은 배우고 사랑하고 일하는 것 이었다“는 게 산수(傘壽)를 앞둔 나의 인생관이다. 나는 바쁜 인생을 식소사번(식소사번) 속에 알뜰 하게 살아 왔다. 그러나 노년을 대한언론인회의 품에 안기게 돼 마냔 행복하다. “행복은 만족하는데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 공산성 지켜온 백제 문화의 향기
2001년 가을철 문화역사 탐방의 주제는 '백제의 고도를 찾아'로 정하고 공주와 부여 일원에 걸친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를 돌아보기로 했다.
두 대의 버스에 나눠 탄 80여명의 회우들은 오전 10시 프레스센터 앞을 떠나 약 2시간 후에 공주 공산성 성곽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가려졌던 백제문화에 대한 기대감이 우선이었지만 투박한 시골의 가을 맛에 거는 기대감도 한 몫을 했다. 정오가 넘어서야 송산리 고분군을 탑사 했다. 이 고분군은 하나의 거대한 봉분 밑에 시신을 안치한 7개의 석실이 있으니 백제 왕국은 벌써 15세기 전에 현대판 납골 묘를 조성 한 것 같았다.
백제 25대왕 사마왕(斯麻王)(523년 사망) 즉 무령왕릉은 그 중 7호분에 속한다.
30년 전인 1971년 7월 7일 무령왕릉이 천년의 긴 잠을 깨고 세상에 모습을 들어 냈었다. 발굴 된 부장품들이 1,082,908 종에 달했다. 베일에 가려졌던 백제의 역사가 다시 쓰여 지는 순간이었다. 일행은 왕과 왕비의 금제 귀고리, 금제 신발 등 찬란했던 백제시대의 정교한 예술품을 감상하며 감탄했다.
오후 5시께 백마강 대교를 지나니 곧 부여였다. 일행이 정림사지 5층 석탑 )국보 제 9호) 앞에 섰을 때는 벌써 해거름, 고운 가치 노을에 높이 8.4미터 의 장중에 석탑에 물들고 있었다.
이 5층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 시대에 세워진 우리나라 석탑의 효시다. 낮에는 태양에 바 레고 밤에는 달빛에 물들면서 근 15세기 동안, 장중한 자세 그대로 버티며 멸망한 대 백제의 슬픈 역사를 말해 준 석탑. 석탑은 폐허가 된 정림사지를 그때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간데없는 대찰의 빈터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튿날 일행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사진으로만 보아 왔던 ‘백제금동대향로’를 바로 눈앞에 보고 황홀해 했다. 이 향로는 금속 공예 기술면에서도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 되고 있다. 일행은 부소산 고관사, 낙화암을 보고 가을에 노랗게 농익은 백마강에 배도 띄웠다.
이어 60 여 년 동안 백제의 도성이었던 공산성에 올라 영은사, 쌍수정 진해루 등의 옛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공주 박물관에서는 학예관의 안내를 받아 가며 백제의 유물에 관한 해설을 듣기도 했다.
* 의병의 고장 제천을 가다.
대한언론인회는 2004년 봄철 문화 역사 탐방행사를 이해 4월 18일 청풍호반의 도시 충북 제천 일대에서 펼쳤다.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열린 이날 행사에는 이정석 회장을 비롯 90여명의 회우들이 참가했다. 이날 회우들은 베론 성지 관람을 시작으로 해발 453미터의 고갯길 로 박달도령과 금보낭자의 애절한 전설이 서려있는 박달 자연 휴양림과 어 우려 진 박달재 서원 휴게소에서 엄태영 제천 시장이 마련한 도리 채 묵 밥으로 먹 거리 와 함께 점심을 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어 자양영당 KBS 촬영장 등을 둘러 본 뒤 이어서 삼한 시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 의림지를 탐방했다. 최귀조 당시 편집위원장은 이날 행사의 의미와 제천 지역 문화역사 탐방 상황을 회보 제216호(2004년 5월 1일자) 8면 ‘멋이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고장’ ’한반도 최상의 호반의 도시 제천’ 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 도솔산 전투현장, 6. 25 의 넋이--
2004년 7월 17일 회우 80영명이 아직도 전흔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양구 춘천지방으로 역사의 현장을 찾아 떠났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춘천에서 3일 간 피나는 방어전이 벌어 졌고 양구의 도솔산 전투에서 해병대의 승리는 깊이 남을 한국전의 전사다. 일행 중에는 도솔산 전투의 노병도 있었다. 답사반이 찾은 도솔산 전투 현장에는 아직도 그때 격전의 흔적들이 역역하다.
회우들은 이곳에서 산화한 영령들을 위해 묵념하며 그 젊은 넋을 달랬다. 귀로에 양구에 있는 이 고장 출신 박수근의 미술관을 찾았다. 회우들은 1965년 젋은 나이에 요절한 박수근의 유화 ‘굴비’ 와 드로잉 작품 ‘시장’ ‘독장수’ 등 이 천재 화가의 작품에 향수를 느꼈다. 전쟁터와 미술 장터를 함께 누빈 문화역사 탐방의 현장이었다.
2. 위상 높인 해외 연구시찰
본회는 한국 프레스센터의 도움을 받아 회원 17명으로 해외연구 시찰단 3개 반을 편성, 1993년 10월 11일부터 24일 까지 10 여 일 간 북미주(미국, 캐나다), 서구(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동구(폴란드 헝가리 독일) 지역들을 두루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동안 한국언론재단의 후원에 의한 현역 및 퇴역 언론인들의 해외 연구시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찰단의 선정에 일방적으로 재단 쪽에 있었기 때문에 언론인회는 재량권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언론재단은 당시 이혜복 회장에게 인원을 선정해 달라고 의뢰해 왔다. 이 회장은 본인의 참여를 고사한 채 북미 반에 이경남 회우 등 5명, 서구 반에 김정한 회우 등 6명, 동구 반에 한동원 회우등 6명을 선정, 파견함으로써 본회 창립 이래 처음으로 회우들이 지구촌을 누비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또한 본회의 대외적인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당시 동구 지역에서는 러시아가 한치 앞을 내다 볼수 없는 정쟁의 회오리 속에 휩싸여 있었으며 독일은 통일 3주년을 항가리는 반소 항쟁 기념일을 앞두고 들떠 있었다. 북미와 서구에서는 우루과이라운드(UR) 의 막바지 협상을 놓고 EC와 미국을 비롯한 당사국들이 국경 없는 경제 블록을 이루면서 각기 광역 경제권을 확보하려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아태 지역도 APEC의 달아오른 파고가 잔잔하지 않았다. 지구는 바야흐로 EC, NATO, APEC의 경제 3국체제로 숨 가쁘게 회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본회 회우들의 지구촌 탑사는 시의 적절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 에 걸친 대변혁의 현장을 연구시찰단은 어떻게 보고 느꼈을까! 귀국 후 시찰단은 회보 제 92호(북미, 이경남) 제 93호(서구 김정한) 제 94호(동구 김재영)와 단행본 (격동하는 지구촌을 가다) , 좌담회 등을 통해서 귀국보고를 했다.
회보와 책자는 회원들은 물론 각 언론기관과 전국 각도서관에 배포되었다. 또 책자에는 서구 문화 기행을 박성용, 동구 문화 기행을 민 기, 동구문화 기행을 문제안 회우가 맡아 썼다. 귀국 좌담회는 1993년 11월 19일 오전 10시 프레스 센터 회의실. 사회는 임석기회우, 참석자는 박문송 한동원 오양동 이원영 이경남 회우였다.
참고로 회우들의 해외 시찰 보고에 나타난 특기사항을 요약 하면 다음과 같다
1) 북미주 시찰단, ‘용기 지성 지닌 미국언론 세계선도’
미국 캐나다 시찰단 5명이 미국 서부의 관문 로스앤젤리스에 도착 한 것은 1993년 10월 11일, 때마침 한흑(韓黑)갈등 소요의 여진이 남아 있어 긴장된 분위기였다. 거기에다 서부 최대의 유력지 LA타임스 방문계획이 휴간일로 빗나가 일행은 총영사관 한국문화원을 방문, 흑백갈등의 원인과 진정 사항을 듣고 안심할 수 있었다.
일정을 바꿔 천연동굴, 헐리우드, 디즈니랜드, 그랜드캐년과 한미우정의종 라스베이거스의 현란한 야경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 보너스였다. 일행이 세계정치의 심장부인 워싱턴에 간 것은 이튿날 선진국의 정수가 무엇인가를 체감했다.
특히 닉슨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낸 워터게이트 사건은 이미 현대사의 고사가 되었지만 그 사건의 동력은 바로 미국 언론의 용기와 진실 추구의 집요성과 보도 자세의 공정성에 있었다는 것을 현지에서 모두들 실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