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우들 모두가 기다려지는 가을 철 문화탐방. 올해는 명성황후 생가와 영릉(세종대왕 릉) 신륵사가 우리 일행을 반겼다. 아침부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우산을 준비한 회우들도 있었지만 여주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더 없이 슬기롭고 어지신 세종대왕과 뚜렷한 주체의식을 가지고 북방을 정벌, 옛 국토를 회복하려던 효종대왕의 능침을 모신 곳 여주, 고려가 낳은 빼어난 문장가 백운거사 李奎報 (저서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의 고향이기도 하다. 언론인 송지영씨는 여주를 가리켜 “술과 시가 흐르는 기름진 고장”이라고 격찬했었다.
민유중 묘막 명성황후 생가 터
인터체인지를 지나 버스로 10여분 달리니 명성황후(조선조 제 26대 고종황제의 비) 생가, 개화기에 뛰어난 외교력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던 명성황후가 출생해 8세까지 살던 집이다.
유창한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다는 방을 뒤로하고 뒷산에 오르니 숙종의 장인이자 명성황후의 6대조인 민유중의 묘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준다. 이 묘는 혼유석에 제사를 지내는 게 특이했다. 민유중, 그는 인현왕후의 생부로 그 역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 간 역사의 인물이다. 명성황후 생가 터가 바로 민유중의 묘막이 된 연유를 늦게나마 안 것도 큰 공부였다. 당시 건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뿐이었으나 1995년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다고 한다. .
관광객으로 붐비는 세종대왕릉
명성황후 생가에서 지근거리엔 천하의 명당 세종대왕릉이 한창 붐비는 관광객과 수학 여행온 학생들을 맞고 있다. 사적 제195호. 원래 영릉은 소헌왕후(세종대왕 비 심씨)가 죽은 1446년(세종 28) 광주 (廣州) 헌릉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右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세종대왕의 발명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등 과학기구를 발명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하여 국토를 확장하였으며 대마도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학문을 중시하여 학자를 양성하고 활자를 개량하여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요즘 세상에 태어나셨다면 노벨상은 따 놓은 당상이 아니었을까. 영릉 참배에 앞서 여기서도 미모의 해설사는 그 특유의 전문지식을 총동원해 한 가지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다.
왕릉은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능의 하나로서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두 개의 혼유석이 있고 봉분 둘레에 돌난간을 둘렀으며 12개의 석주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능의 정중앙에 팔각의 장명등이 있으며 주위에 석호·석양·석마·문인석·무인석·망주석을 배치했고 능뒤에는 나지막한 곡담을 둘렀다. 예로부터 동입서출(東入西出) -동쪽으로 들어갔다 서쪽으로 나오는 것이 정도라는 해설사의 말을 들어서인지 모두들 우측통행이다. 다른 묘는 제단에 음식을 놓는데 세종릉 제단은 그 자리에 영혼이 나와서 절을 받는다는 사실도 일러준다.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마치고 기념촬영. 어느새 시간은 정오를 넘기고 있다. 학수고대하며 찾은 식당은 여주 관광안내소에서 자랑삼아 추천한 ‘하늘새’식당이다. 코스정식인줄 모르고 찾은 우리 일행은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는 듯 싶었다 그래도 맛은 있었다는 촌평도 없지 않았지만 여주명물 능서 쌀 막걸리가 그나마 기분을 호전 시켜 준 셈이다.
신륵사에선 ‘보물찾기’ 바빠
서둘러 신륵사로 가는 길, 해설사가 먼저 나와 기다린다. 신륵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전각 사찰로 신라 진평왕 때에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며 1376년 나옹선사((懶翁禪師․1320-76)가 입적한 천년고찰로도 유명하다. 나옹선사는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의 제자이며 조선건국에 기여한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선사의 시가 생각난다. 해설사는 자기 말대로 ‘보물찾기’에 바쁘다. 보이는 게 모두 보물이다. 1472년(조선 성종3)에는 영릉 원찰로 삼아 보은사라고 불렀다가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넛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설명이다.
오후 4시 반까지 서울에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듣는 둥 마는 둥,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30분 서둘러야 할 시간이다. 이번 문화탐방에도 해설사가 무색할 정도로 전국의 박물관이나 역사 문화유적지에 밝은 김관태 회우(박물관 도슨트)의 해박한 지식은 단연 압권이었다. 모처럼 분리 시도해 본 금년도 대한언론상 시상식이 많은 문화탐방 회우들로 하여 자리가 한층 빛났으니 집행부 입장에선 그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다. 가을철 문화탐방, 대한언론상 시상식 두 행사를 하루에 무난히 치를 수 있도록 협조해준 회우 여러분께 거듭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