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언론인회 금년도 가을철 문화탐방엔 홍원기 회장을 비롯, 모두 73명의 회우들이 참가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가 유난히 고맙기만 한 9월 23일 오전 8시 프레스센터를 출발한 우리 일행이 강화대교를 건너기 전 차창 밖으로 만난 곳은 문수산성(376m), 사적 제 139호로 조선 19대 숙종 20년(1694)에 바다로 들어오는 외적을 막고, 강화도 방어를 위해 쌓은 성이다.
문수산성 에 심취해 있는 동안 차는 어느새 강화도 평화전망대에 도착했다. 이곳 평화전망대는 강화군 양사면 성리에 위치한 제적봉(制赤峰)에 있으며 일명 758 OP로 불려진다. 강 건너엔 북한의 개풍군, 연백군이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깝다. 왼쪽으로 예성강, 오른쪽에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되는 지점에서 남쪽에 위치한 민간인 통제구역, 북한과 최 근접거리는 1.8㎞에 불과해 육안으로도 북한사람들의 일상생활 모습과 개성공단 탑, 아름다운 송악산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최적의 안보관광지로 꼽히고 있다. 언제 들어도 가슴 절절한 고향을 북에 두고 온 실향민들이 이곳에서 느끼는 감회가 어떠할지는 한 여성 해설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김일성 사진 너무 부각시킨 2층 전시관 마음에 걸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안보전시관에 부착된 남북한 비교 차트에서 김일성 사진을 지나치게 부각시키고 남한상황은 북한 설명 밑에 깔아버린 것. “굳이 김일성 사진을 넣고 싶다면 대한민국의 이승만 건국대통령 사진도 올려야 형평성에도 맞지 않느냐” 며 목청을 돋운 어느 회우의 지적에 공감이 간다. 북한의 우상화실태를 적나라 하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김일성을 부각시킨 것으로 이해는 가지만 우리 입장에선 당연히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대한민국 발전상을 더 부각시키고 이승만 건국대통령 사진도 올려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외포리 까지는 버스로 약 30분정도, 예정시간보다 일찍 음식점에 도착한 탓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좀 길긴 했지만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음식점에서 우럭매운탕을 들며 마음껏 회포를 푸는 모습이 마냥 정겹다. 창밖으로 석모도가 보이고 그곳 해명산엔 신라 선덕여왕 4년(서기 635년)에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이곳에 절을 창건했다는 보문사가 그립지만 이번 탐방코스엔 빠져 있다.
오후에 찾은 곳은 강화 역사박물관, 작년 10월 28일 개관한 이 박물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적 제137호 강화 고인돌 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강화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개국시대부터 청동기시대, 고려, 조선, 근현대시대까지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전시, 보존 하는 역사의 현장으로 옛 선조들이 남긴 문화재를 통해 오랜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이어서 둘러본 곳은 고려궁지. 고려 고종 19년(서기1232년) 6월 당시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고려무인 최우의 용기 있는 주장에 따라 도읍을 송도에서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로 옮겼는데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다. 원종 11년(서기1270년) 5월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그 후 이 성은 1637년 병자호란때 강화성이 청나라 군에게 함락되는 등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궁궐과 성은 무너지고 고려 궁터에는 조선시대 건물인 승평문, 강화유수부동헌, 이방청 종각 등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고려궁지 안엔 외규장각이 파란만장한 역사의 뒤안길을 되새기게 한다.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이다. 말하자면 왕립 도서관 규장각의 부속 건물인 셈이다.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를 비롯해 총 1,000여권의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많은 서적을 약탈해 갔다. 작년에 그중 일부인 의궤를 반환받았으니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 감회가 새롭다..
말 그대로 ‘한국 역사의 축소판’ 시대별 유적 한 눈에
이런 사연을 지닌 고려궁터를 지나 언덕 아래로 내려오다 보면 용흥궁(조선조 철종이 머물던 궁)공원이 보인다. 계단을 올라 쪽문을 들어서니 성공회강화성당이 110년 넘는 세월을 지키고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불교 건축법과 궁궐 건축법, 그리고 성공회 전통의 바실리카 양식이 더해진 건물이다. 이 건물을 짓기 위해 영국인 신부가 백두산으로 100년 넘은 소나무를 구하러 갔었다. 나무를 구해 서해를 통해 강화까지 가지고 오는데 6개월, 다시 나무를 말리는데 6개월을 보내며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강화도는 인쇄문화와도 관계가 깊은 곳이다. 정족산 사고와 선원보각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족보, 그리고 선원사에서 편찬되었다는 고려 팔만대장경까지 이곳에서 조판돼 요즘으로 말하면 최첨단 IT 기술의 현장에 다름 아니다.
강화도에 얽힌 슬픈 사연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 왕 희종(熙宗)부터 조선시대 연산군 영창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이곳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기록이 있다. 그중 연산군은 유배 온 지 두 달 만에 이곳에서 죽었고 그의 아들과 부인도 이곳에서 명을 다했다. 어린 나이의 영창대군도 이곳 강화도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조선조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뒤에 효종이 됨)이 이곳 강화에서 난을 피했다. 조선조 후기엔 ‘강화도령’ 철종이 살던 곳이며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이 이곳에서 이루어져 치욕의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곳이 바로 강화도가 아닌가. 강화도엔 이밖에도 볼 곳이 많다.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병인양요, 신미양요, 일본군함 운양호 침공 등 근세 외침에 줄기차게 싸운 전적지인 갑곶돈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그 내륙 쪽으론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전등사(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아도 화상이 창건)가 있다. 참성단으로 유명한 마니산도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강화의 영산이다. 귀경시간에 쫓겨 볼 곳을 다 둘러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